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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투표로 무엇을 바꿀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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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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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른 아침 줄지어 선 유권자들이 하나같이 진지하다. 의욕에 차 있다. 실망했던 정치가 다시 싱싱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8, 9일 사전 투표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것은 이런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서다.

평소 살다 의욕이 떨어지고 힘이 들면 시장을 찾는다.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합창이 겸손을 가르친다. 그 틈에 끼어 나도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진다. 의욕이 솟구친다. 분노나 지겨워진 일상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정치에 대한 혐오, 공동체에 대한 불신은 투표장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마주치는 순간 잊어버리게 된다. 저 많은 사람이 민주정치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은 몇 명이나 기다리고 있을까.

이번 총선은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었다. 내분과 갈등, 심지어 당이 쪼개지는 일까지 겪었다. 여야의 포석과 행보에 따라 지지율이 오르내렸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선거도 흔치 않다. 개별 후보의 활동보다 중앙당의 움직임이 판세를 뒤흔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쪼개졌을 때는 야당 참패를 예상했다. ‘비노(非盧)’ 세력이 떨어져 나가 국민의당을 만들었다. 권노갑 고문, 박지원 의원 등 동교동 인사를 포함해 호남 세력이 대거 동조하면서 ‘안철수 신당’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고,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기용되면서 분위기가 다시 급변했다. 김 대표의 행보는 과감했다. 친노 핵심 인사를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중도노선을 부각하면서 탈당 흐름에 제동이 걸렸다. 국민의당 내부에서 갈등이 생길 정도로 더민주가 주도권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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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름을 다시 돌려놓은 게 비례대표 파문과 문재인 전 대표의 지원유세다. 김 대표가 스스로 비례대표 2번에 올려놓자 ‘셀프공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친노 운동권 세력이 비례대표 공천에서 소외된 데 반발했다. 문 전 대표가 나서서 겨우 분란을 가라앉혔다. 이 과정을 통해 더민주의 주인이 누구냐 논란이 일었다. 여기에 문 전 대표가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호남 민심이 국민의당 쪽으로 다시 움직였다.

선거는 자기가 잘해서보다 상대 실수로 이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란이 일었으니 새누리당 압승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 ‘친박’의 무모한 공천이 판을 뒤집어버렸다. 특히 유승민 의원을 자르지도 못하면서 탈당하라고 몰아간 것이 대구는 물론 수도권 민심마저 흔들어놓았다.

돌아보니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다. 정책은 없고 노골적인 파벌 다툼과 토끼몰이뿐이다. 나는 집토끼인가, 산토끼인가. 누가 잘못하나 경쟁 같다. “이번에는 투표하지 않겠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과반에서 180석 사이는 별로 차이가 없다는 판단도 승부욕을 무디게 했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공천 파동, 분당 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런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을 믿고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투표율은 꾸준히 추락해왔다. 제헌의회 총선 95.5%에서 19대 총선 54.2%까지 거의 끊임없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총선에도 사전투표가 처음 도입돼 사전투표율 12.2%를 기록한 것이 기대를 갖게 한다. 사전투표율이 11.5%였던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최종 투표율은 56.8%였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투표해봐야 바뀔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돌아봐도 투표가 역사를 바꾼 기억이 생생하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은 민정당의 2중대(민한당), 3중대(국민당)를 제치고 제1야당이 되어 6월 민주항쟁의 기초가 됐다. 88년 13대 총선에서는 여소야대를 만들어 청문회를 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다.

총선 직후에도 소용돌이가 친다. 여야 모두 전당대회가 이어진다. 새누리당은 공천 과정에서 드러난 계파 갈등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 야권도 책임론과 대선을 겨냥한 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다.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더민주의 문재인 전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대선으로 갈 수 있느냐가 걸려 있다. 야권 판세는 여기서 갈라진다. 서울 종로(오세훈-정세균), 대구 수성갑(김문수-김부겸) 승자는 바로 대선 후보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 큰 변화의 방향을 당신이 정하는 것이다. 망설여진다면 후보를 보고 판단하자.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도 사람이다. 어떤 이는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달라고 한다. 하지만 최선이 아니면 차선, 그것도 아니라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포기할수록 나쁜 후보가 당선될 확률은 커진다. 당신은 대한민국 국회의 면접관. 이번만은 정신 차리고 정말 좋은 사람을 선발해보자.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