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거침입」 놓고 공방전|변호인 총사퇴·구형공판 강행 민정당사 농성 재판|재판부 기피신청 인사로 해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재판부 기피신청으로 한때 공판절차가 중단되기까지 했던 민정당사 농성학생사건에 대한 재판은 12일 연대생 5명에 대한 공판재개 (재개)벽두 변호인단이 총사퇴, 퇴장한 가운데 재판부가 구형공판을 강행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은 지난7일 피해자측인 민정당의 이한동 사무총장이 담당재판부를 찾아가 구속 학생들에 관용을 요망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피고인들의 조기석방을 예견할 수 있게 됐지만증인신청을 둘러싸고 변호인단의 총사임, 피고인들의 단식선언 등으로 한치도 양보가 없이 내면적으로는 「활화산」인 셈이다.
그러나 재판부도 12일에 이어 13일에도 결심 (결심)을 변호인단 사임 후 강행한 것으로미루어 이미 일정한 시일 안에 재판을 끝낸다는 방침이 굳어져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학생들도 『이번 재판절차를 거부한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새로 구성된 재판부에 대한기피신청을 내는 등 더 이상의 「지연작전」은 없을 것으로 보여 이 재판은 형사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인출석 없이 결심판결선고가 진행될 것이 틀림없다.
재판부기피신청·변호인단 총사임 등 일반사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기록을 남긴 이번재판의 쟁점과 변호인·재판부·검찰 측의 입장을 살펴본다.

<증인신청>
검찰공소장에 따르면 이들 대학생들의 혐의내용은 「주거침입」.
변호인 측은 이에 대해 개방돼있는 공당의 당사에 들어간 것이며 ▲당시 집주인이라 할 수 있는 민정당 관계자들의 퇴거요청이 없었고 ▲검찰이 제시한 범죄증거는 자백뿐이며 ▲자백 또한 고문 등에 의해 임의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집주인 (권익현 당시 민정당전대표등 5명)을 불러 당시의 상황과 출입허용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중 박찬종 변호사는 『유죄의 입증을 위해서라도 검찰 측이 먼저 이들에 대한 증언을 요청해야 마땅한데도 증인들의 입장을 고려해서인지 꺼리고 있어 기다리다 못해 변호인들이 증인신청을 했다』고 했다.
변호인들은 민정당 측이 대학생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막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주거침임」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
변호인 측의 신청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공소사실을 시인하고 있고 기록만으로도심리가 충분하다』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법원의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바뀌어 공판이 속개된 뒤의 증인재신청에도 『민정당측이 대학생처벌 불원 의사를 전달해와 증인으로 채택할 필요가 없다』고 못 박았다.
형사재판의 경우 증인신청은 검찰·변호인 양측에서 모두 할 수 있으나 채택여부는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있다.
66년12월에 있었던 고장준하씨(전사상계대표·75년작고)사건에서 변호인들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한 바 있다.
당시 장씨는 65년10월 대구시 수성천 변에서 열린 시국강연회 발언도중 『박대통령은 밀수왕초』라고 말해 명예훼손 등으로 구속 기소됐던 것. 변호인들은 『명예훼손죄가 피해자의 처벌의사표시가 있을 때만 성립된다』며 박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었다.
담당 안우만판사 (현 법원행정처기획조정실장)는 『서류심사만으로도 처벌의사를 알 수있다』며 이를 기각했었다.

<재판부기피신청>
형사소송법(18조)에는「법관이 재판당사자와 인척 등 관계가 있거나 불공정한 재판을 할염려가 있을 때 법관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기피신청 후 법원정기인사로 재판부가 자연스럽게 바뀌는 바람에 변호인· 법원 쪽의 「입장」을 살린 채 처리된 셈.
재판부기피신청이 들어오면 재판진행이 정지되고 기피 당한 법관의 소속 법원의 합의부에서 기피여부를 결정하게 되지만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서도 어떤실익을 기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한사건의 피고인들을 3개 재판부로 나누는 등 법원 측이 「지나친」 신경을 쓰자 이에 맞서 비장의 무기인 「히든 카드」를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정치적 사건에서 법관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진 적은 오직 한번 전례가 있다.
74년6월 김대중씨의 대통령선거법·국회의원선거법위반사건공판 때의 일.
당시 재판장인 박모부장판사 (52·현 변호사)가 증거조사과정의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집권공약을 연설했으니 사전 선거운동을 했구먼』하고 혼잣말을 한 것이 발단이었다.
변호인들이 이말을 들어『재판장이 유죄예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 재판부기피신청을 냈던 것.
당시 1심인 서울형사지법합의부와 항고를 맡은 서울고법은 이 신청을 각각 기각했으나 재항고심인 대법원에서 74년10월 하급심이 김씨의 기피신청을 제대로 심리하지 않은 채 기각했다며 취소결정을 내려 결국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졌던 것.
당시 대법원의 이 같은 결정은 법조계로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조치로 법조계 조야에서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었다.
이밖에 76년 명동사건관련 윤보선피고인 등의 변호인단도 재판부기피신청을 냈으나 기각 됐었다.

<변호인단 사임>
변호인10명이 스스로 법정에서 재판부와의 불화(?)를 이유로 사임한 경우는 드문 일.
76년 명동사건관련 윤보선·함석헌·정일형 피고인 등 3명의 변호인단 3명이 모두 사임한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법원 측은 이들 3명에 대해서는 구형을 연기하고 국선변호인 9명을 선임한 후공판을 속개하고 나머지 15명의 관련피고인과 분리 심리했었다.
이번 변호인들은 『재판부가 공정성을 잃고있어 이러한 상황에서는 변론을 계속할 수 없다』고 사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변호인중 용남진 변호사는 『외부에서 변호인들이 대학생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도 들려 사임결정에 참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 측은 『변호인들의 사임은 정치적이며 예정된 각본』이라고 혹평을 하는가하면 『대학생들의 조기석방이 예상되고 변호인들의 할 일을 다한 결심단계에서 극적인 효과를 노린 제스처』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변호인들은『1심 재판결과가 불만스러울 경우 강력한 대응책을 세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변호인의 사임이 이번 사건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또 『유죄가 선고될 경우 학생들이 곧바로 항소할 것』이라며 항소심을 겨냥하기도해 변호인의 사임은 1심 재판부에 부담을 주고 변호인들의 입장을 천명하려는 숨은 뜻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권일·허남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