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란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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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전에 살던 집 근처에 20여 가구가 한 울 안에 모여 사는 ××네 집이 있었다.
그 집은 리어카를 끄는 집주인이 방 하나 부엌 하나씩을 차례로 늘려 붙여 월세를 놓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대개는 싸구려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악다구니 싸움질도 그치지 않고, 그런가하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집으로 그 중의 반장격인 선영이 엄마는 가끔 양지바른 우리집 대문 앞 돌계단에 한집에 사는 여자들을 모아놓고 술추렴을 하곤 했다.
어린 남매를 키우고 있는 아직 젊은 엄마인 그는 그러면서 고래고래 목청을 뽑아 노래도 부르고 또 인사불성으로 취하여 엉엉 울기도 하는 등 아무튼 그렇게 온통 좀은 골목 안을 벌컥 뒤집어 놓기가 예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선영이 엄마는 나에게 쌓이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고 있느냐고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저는 술을 마십니다. 화투장을 들거나 춤방에 가서 춤을 추거나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새까맣게 기미가 낀 얼굴에 두껍게 가루분을 얹은 그의 얼굴을 마주보고 서 있으려니 어쩐지 괴롭고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서툴게 발음되고 있는 「스트레스」란 낱말의 의미가 고통스럽게 내 가슴을 파고 들였다.
『글쎄요….』
머뭇거리는 나에게 선영이 엄마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자신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 가난, 남편의 무능, 자신이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자의식, 사회에 대한 원망, 이런 것들로 뭉뚱그려지는 절망과 좌절감 모두를 선영이 엄마는 스트레스라고 풀이하고 있었고, 그 스트레스는 반드시 풀어야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는 또 반드시 신바람 나는 무엇, 현실의 자신을 완전히 잊을 수 있을 만큼의 도취와 쾌락의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은 TV에 나와서 돈을 들고 나가 요것조것 하루종일 쇼핑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지만 어디 우리 같은 사람이야…그저 끽 해야 3백원짜리 소주 한 병이면….』
그러면서 술병에 남아 있는 술을 그는 마저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냥두면 편안한 우리들인데, 분수에 맞추어 자식 키우는데 성심을 다하고 가난한 살림이지만 애정을 기울여 반질반질 윤을 내고 깨끗이 빨아 헹군 빨래를 햇볕에 내 널고, 오늘 같은 봄날이면 아이들을 앞세워 냉이를 뜯으러 들판을 헤매며 옛날을 생각하고….
그런데 누가 이렇게 소박한 우리들에게 스트레스란 낱말을 심어 고통을 일깨워 주고있는가.
도대체 누가…? <김혜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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