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2)-조용만|교육자의 기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즈음 총독부는 사립전문학교에 손을 대기 시작해서 먼저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을 검거해 가고 도서관을 수색하는등 트집을 잠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보성전문학교 차례란 말이 떠돌아다녀 학교에서 몹시 기장하고 있었다.
봄 입학시험때인데 어느날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이라는 자가 보성전문학교에 나타났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필경 무슨 일이 터지는구나 하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 사실은 이 자가 학생의 입학 청을 하러온 것이었다.
보성전문학교는 동대문경찰서의 관내여서 이 자는 이것을 믿고 어느 친일 기업체사장의 아들을 입학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장차 그 기업체의 중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기어이 이 학생을 입학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김성수교장은 성적이 좋으면 물론 입학시킬테니 걱정말라고 대답해서 모냈다. 그 뒤에 이 고등계 주임은 또 와서 그 학생이 사실은 성적이 그리 좋지 않으니 이 점을 고려해 꼭 입학시켜 달라고 중언부언 부탁하고 만일 입학시키지 않을 때에는 학교 전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는지 모른다고 협박적인 말까지 하고 갔다.
그러데 시험을 치르고 보니 그학생의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못해도 1백40∼1백50점은 되어야하는데 이학생의 득점은 모두 합해서 단 8점밖에 안되었다. 이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입학시킬수 없었다.
발표하기 전날 아침 고등계주임은 정복 정모에 칼을 차고 정복을 한 부하경찰관 네 다섯과 사복형사를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교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이야기에 들어갔다.
이야기는 오래 걸려 오후가 되어서야 그들은 돌아갔다. 모두들 궁금해서 교장한테 달려갔는데, 김성수교장은 담담하게 『사람이 무슨 일에 집착하면 안됩니다』하고 말문을 열면서 단호하게 입학을 거절하였는데, 물론 학교가 폐쇄를 당해도 좋다는 각오로 이렇게 거절했다고 하였다. 그때 정세로 보아 고등계주임이란 직권을 내건 사람의 노골적인 압력을 거절한다는 것은 학교의 폐쇄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한다. 민족을 위해 일한다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에 집착해서 내 원칙을 구부리고 학생을 입학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김성수의 주장이었다.
그 말에 교수들은 큰 감면을 받았는데, 학교 문을 닫아도 좋다는 그 각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구부리지 않는 대쪽같이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암흑과 절망의 30년대 말기에 있어서 민중의 정신적인 지왕로서 숭앙을 받아온 위대한 교육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굳은 의지를 가졌지만, 동시에 아주 온후하고 관대하고 성실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다른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해서 모든 일을 민주주의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그의 행동방식 이었다.
김성수는 원래 자신을 교육자로 자처하고 정치문제는 송진우에게 맡겼었다. 그러나 해방후 송진우가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부득이 정치의 제일선에 나섰지만 본의는 아니었다.
1951년 김성수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승만대통령은 무궤도한 독재·독선을 일삼는 사람이어서 김성수와 뜻이 맞지 않았다. 부산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회와 민주주의를 말살하려고 하자 김성수는 단호하게 l952년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그는 중풍에 걸려 와석중 1955년 서울계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65세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