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동방무례지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기사 이미지

양선희
논설위원

고리타분한 얘기일 수도 있다. 예의(禮儀)에 대한 얘기다. 지난주 막을 내린 ‘공천막장극’. 이 블록버스터급 막장극 와중에도 존재가치를 뽐냈던 대기업 사용자들의 갑질 횡포. 이 광경에 문득 ‘비례(非禮)는 무법(無法)’이라 했던 순자(荀子)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나라 입법(국회)과 밥줄(기업)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이 예의를 잃는 장면은 가히 무법천지와 같았다.

공천극의 무수한 장면 중 갑(甲)을 꼽으라면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위원장의 ‘바보’ 타령이다. 그는 수틀리면 아무에게나 대놓고 바보라고 일갈했다. “기자들이 왜 그렇게 바보 같나.” 이건 약과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에 “바보 같은 소리”라며 TV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치는 장면은 그 스스로 무례함에선 대마왕급임을 인증하는 것이었다.

공자(孔子)가 “예의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는 아마도 예의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가 개인적으로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가 아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공천하는 일에 그렇게 법 없이(無法) 사는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국민이 지켜봐야 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순 임금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無爲) 나라를 잘 다스린 비결은 다만 자세를 바로 하고 왕의 자리(南面)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스리는 자의 행위가 바르면 백성은 저절로 잘 행동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국가 권력자부터 예의가 무너지면 그 혼란은 백성에게 이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지경에 있는가.

경제행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예의 있는 경제’에 대해 순자는 “저울은 물건의 준거이며, 예(禮)는 조절의 준거”라는 말로 설명했다. 인간의 욕망은 창조의 원천일 수도 타락과 파괴의 원천일 수도 있는데 예라는 수단을 활용해 이런 욕망을 조절하여 모든 백성이 경제생활에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 것은 끊어주고, 짧은 것은 이어주고, 좁은 것은 넓혀주고… 처음과 끝이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다.” 순자의 예치(禮治)는 궁극적으로 조화와 균형적 발전을 이른다. 가진 자가 해야 할 일은 가진 걸 자랑하거나 모자람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타고난 능력과 자질에 따라 적절하게 삶을 잘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게 예라고도 했다.

현대사회의 경제를 이끄는 힘은 기업에서 나온다. 한데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예의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할까.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이 운전기사에게 행한 갑질. 폭언·폭행에다 사이드미러를 접고 달리라는 등 기행을 일삼았단다. 두산모트롤은 명예퇴직을 거부한 직원에게 면벽근무를 명하고 행동의 자유를 박탈했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조종사들에게 “업무가 힘들다니 개가 웃을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일갈했다. 기업과 기업주들이 인간과 경제에 대한 예의는 고사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지금 고리타분하게 웬 공자·순자 타령이냐고? 나도 공자왈 맹자왈을 꼰대의 흰소리 정도로 치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데 요즘 동방예의지국이 어느 전설에서나 존재했던 나라로 들릴 정도로 예의가 무너지고 무례와 혼란이 지배한 이 나라를 보고 있자니 2000여 년 전 그분들의 고민이 새삼 가슴에 확 와서 닿았다. 혼란스럽고 무도했던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그분들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회복하는 방안으로 왜 예의를 설파했는지 절절히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지금 우린 누가 봐도 ‘동방무례지국(東邦無禮之國)’에 산다. 예에 대해선 유자(儒者)와 달리 좀 삐딱했던 한비자(韓非子)도 노자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도를 잃은 후 덕을 잃고, 덕을 잃은 후 인을 잃고, 인을 잃은 후 의를 잃고, 의를 잃은 후 예를 잃는다.” 예를 잃었다는 건 다 잃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면 채울 걸 고민해야 할 때다. 다시 한번 예로 돌아가자.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