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세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유세장에서 본 광주는 이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문제를 하나 더 간직하고 있음을 곧 알게 해준다.
지난2일의 광주동-북구와 5일의 광주서구합동연설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수위 높은 정치발언과 원색적인 매도가 난무했다. 민정당 후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야당과 무소속후보들이 국가원수에 대해 존칭을 생략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독재」「의거」「타도」「깃발」「원혼」「위령탑」등 이제껏 일부 학생데모에서나 들리던 구호가 여과 없이 유권자의 귓전을 때렸고 3, 4만을 웃도는 인파가 「우」「와」하는 야유와 함성을 질렀다.
야당후보들은 누가 더 세게, 더 극적으로 『광주의 한』을 묘사하느냐 하는 경쟁을 벌이는 것 같았으며 얼마나 논리적이며 합리적인가는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유세장만 보면 함성과 야유로 대세가 판가름 날 듯한 분위기였다.
얼토당토않은 내용이라도 욕만 하면 박수치고, 냉정을 호소하면『집어치우라』는 야유가 터져 나오는 곳에서 상반된 견해에 객관적 판단을 구하기란 힘든 법이다.
광주의 선거유세장은 광주사태의 비극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많은 연사가 문제를 거론하고 청중들도 거센 반응을 드러냈다.
이렇게 해서 광주사태는 선거를 통해 새삼 시비곡직의 전면에 부상한 셈이다. 그렇지만 유세장에서 돌아가는 여러 사람들은 『어째, 시원하기는 헌디,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 같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개중에는 『평소에는 찍소리 않던 사람들이 선거 때를 틈타 무책임한 선동을 한다』고 걱정하는 인텔리들도 있었다. 한 공무원은 당 후보의 설득에 속으로 귀기울이는 사람이 있지만 내색을 않는다고 귀뜀한다.
그러나 『슬프고 괴로운 광주를 기쁜 광주로 만들자』(고귀남 후보), 『언제까지 해태타이거즈의 승패에 희비를 걸고 살 것인가』(이영일 후보)라는 여당후보의 말에 수긍보다는 일단 「우」하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선거라는 제도가 이 같은 갈등을 표로써 조화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이번 선거는 특정 정당후보의 당락을 떠나 광주시민에게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청중에 영합하는 목소리만 높고 군중도 피해의식에 대한 집착을 떨쳐 일어나지 못한다면 광주의 열병은 또 다른 형태로 변질돼 존속할 조짐도 엿보였다.
유세만 했다하면 3, 4만명이 모이고 반응이 적극적인 광주시민의 선거에 대한 관심이 이상열기로 치닫지 않고 건설적인 의사표시로 나타나 광주사태의 치유에 기여하기를 바라지만 역시 세월이 한참 흘러야겠구나 하는 느낌을 재확인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