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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맞는 우리의 자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2호 34면

아내의 방문연애할 때 아내는 내가 살던 도시에 온 적이 있었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말이다. 그때까지 아내는 한 번도 기차를 타고 가야 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 가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미리 편지로 자신의 방문을 알렸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편지는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아내가 온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나는 역에 마중 나갈 수 없었다.


왜 편지를 했을까? 전화를 해도 됐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그때는 당연했다. 휴대전화도 없었고 주인집에 전화가 있긴 했지만 불편하고 눈치도 보여서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았다. 또 전화보다는 편지가 훨씬 로맨틱했다. 전화는 사무적이었다. 로맨틱한 자신의 방문을 사무적인 전화로 ‘용건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었다. 불과 30년 전이었지만 연인들의 메신저로는 편지가 더 일반적이었다.


아내는 역에 도착해 당연히 마중 나와 있을 나를 기대했다. 나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아내는 내가 자취하는 곳의 주인집에 전화를 했지만 나는 집에 없었다. 아내는 낯선 도시의 풍경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한참 기다리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또렷해지는 걸까? 아내는 나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사실은 떨어져 있으면서 둘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불안해 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에 편지를 보내고 방문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 우리가 만나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소리를 기다리는 사람기다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정신병원에 새로운 의사가 왔다. 의사는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살펴보았는데 다들 병자처럼 보였다. 오직 한 환자만 빼고. 그 환자는 그저 벽에 귀를 대고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 보였다. 환자가 있던 방은 병원 건물의 끝이라서 벽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무슨 특별하게 들릴 소리가 없었다. 환자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항상 벽에 귀를 대고 있었다. 처음엔 미쳐도 참 곱게 미쳤다고 웃어 넘겼지만 귀를 대고 듣는 그의 자세가 너무 진지하고 심지어 엄숙하기까지 해서 의사는 점점 궁금해졌다.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닐까? 저 벽에서 무슨 희망의 소리가, 구원의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확인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의사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벽에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귀를 벽에 바싹 갖다 대고 들어보았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공연히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환자에게 화를 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뭘 듣고 있어요! 의사의 말을 들은 그는 도리어 더 화를 냈다. 안 들리는 게 당연하지. 내가 지금 십 년째 기다려도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당신이 그렇게 잠깐 듣고 무슨 소리가 들리면 그게 정상이겠어?


김수영의 봄밤 그래, 좋아지지 않을 거야. 나빠지겠지. 어쩌면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질 지도 몰라.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리는 자세일 거야. 알아, 기다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는 것.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감 떨어지는 남자 같겠지. 또는 백마 탄 왕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늙어가는 숲 속의 공주처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 감나무를 흔들거나 아예 올라가야 한다고, 백마 탄 왕자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이야. 그것도 하나의 자세야. 그런데 지금처럼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야. 기다리면 우리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십 년을 기다렸다면 또 조금 더 기다려보는 거지. 지금은 봄밤이니까. 봄밤의 수영처럼 서둘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고. 김수영의 시 ‘봄밤’의 첫 연만 옮기자면 이래요.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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