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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사망자, 중·장년>노년…“정신병, 사기 덫에 마지막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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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40·50대 남성 무연고 사망자가 노인(65세 이상) 무연고 사망자(남녀 합산)보다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는 중·장년 남성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노인보다 많은 4050 고독사 3인의 가상 인터뷰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김춘진(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보건복지부의 ‘2015 무연고 사망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는 총 1245명이었다. 그중 40·50대 남성은 483명으로 38.7%를 차지했다. 65세 이상 남녀는 385명으로 31%에 해당했다.

50대 남성은 332명(26.6%)으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특히 무연고 사망이 많았다. 65세 이상 남성은 260명(20.9%), 40대 남성은 151명(12.1%)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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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좋아했다. 몸이 아팠다.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지난해 고독사한 40·50대 무연고 사망자 30여 명의 생전 행적을 지난 한 달간 추적한 결과 사망자 대부분은 이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중앙일보는 서울시 홈페이지에 공고된 무연고 사망자의 생전 주소지를 근거로 망자를 기억하는 주변 이웃들, 병원·노숙인 시설, 시민단체 직원 등을 만났다. 이중 숨진 3인의 사연을 가상 인터뷰(‘망자와의 대화’)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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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서 스스로 목숨 끊은 42세 김씨
보따리상·일용직하다 노숙 생활
그래도 직업소개소 매일 찾아가

그런데 명의 도용돼 1억 빚더미

내가 한때 가위질 좀 한 사람이에요. ”

김씨의 원래 직업은 미용사였다. 3남2녀 중 넷째. 충남 부여에서 고교를 마치고 미용학원에 들어가 자격증을 땄다. 26세 때인 1999년에는 자신의 미용실을 개업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거네요.
“그런가요. (웃음) 그때만 해도 탄탄대로 인생일 줄 알았는데….”

미용실은 3개월 만에 폐업했다. 친구 보증을 잘못 서준 탓이었다. 어마어마한 빚더미가 그를 덮쳤다.

막막하셨겠어요.
“그래도 살아야 했죠. 전국을 돌며 보따리상을 했어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도 하고.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죠. 고생 고생해서 2~3년 만에 빚 다 갚았어요.”
좀 살 만해진 거네요.
“그런데 2003년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슬픔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귀에서 기계 소리 같은 게 들리기 시작했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2006년 정신병원에 입원했죠.”

설상가상으로 입원한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형제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퇴원하고 2012년 다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돈 벌기가 쉽지 않았다. 다음 해 서울역 노숙을 택했다.

일자리는 계속 찾아봤나요.
“직업소개소를 맨날 찾아갔어요.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자기가 어디 실장이라고 하더라고요. 밥을 사주면서 내 명의 좀 빌려주면 돈을 주겠대요.”
빌려줬나요.
“한 푼이 급해 빌려줬죠. 주민등록증 복사해주고 인감증명서도 떼줬어요.”

쓰지도 않은 카드값과 대출금 등을 갚으라며 법원의 이행공고 우편물이 날아온 건 지난해 김씨가 한 노숙인 자활시설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1억원이 넘는 큰 돈이었다. 소명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시설을 나간 뒤 종적을 감췄던 그는 다음달 한강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망시기: 2015년 11월(사인:자살)

|서울 서소문 고가 밑서 발견 40세 오씨
가난 떼려 대구서 홀로 서울 상경
노숙하며 중국집 일하다 병 걸려
일 못 구하고 술만 마시다 결국 …

이리 와서 술 한잔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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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무연고 추모의 집’에서 지난 10일 봉사단체 ‘나눔과 나눔’의 활동가가 사망자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유골함에 붙이고 있다.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은 10년간 보관된다. [사진 홍상지 기자]

애주가인 오씨의 별명은 ‘술통’이었다. 오씨가 안줏거리를 사오겠다며 잠시 일어섰다.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2년 전쯤 술 먹고 차로에서 자다가 차에 치였어요.”

원래 사는 곳이 어디였나요.
“두 살 때부터 대구의 한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성인이 된 뒤에는 중국집 주방 일을 익혔죠. 사랑하는 여자와 만나 딸도 낳고.”
소박한 삶이네요.
“그렇죠? 근데 돈이 너무 없었어. 그래서 10년 전 아내와 아이는 대구에 두고 서울행을 택했어요. 돈 많이 벌려고.”

막상 서울에선 노숙 하며 중국집에서 일했다. 배운 게 그것뿐이라서였다. 대구 집에는 노숙인 지원센터 전화로 가끔 통화했다.

서울 생활은 적응이 좀 됐나요.
“적응할 만하니까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뇌에 문제가 있는지 자꾸 픽픽 쓰러졌어요. 몸이 안 좋으니 일자리가 구해지겠어요?”
병원 치료는 받았나요.
“네. 기초 수급자라 병원비 혜택이 있었어요. 근데 술을 못 끊었어. 초라한 신세가 술이라도 마셔야 잊혀지는데 어떡합니까.”
일은 더 이상 안 했나요.
“노숙하며 알게 된 형님 한 분이 서대문에서 갈빗집을 했어요. 고시원에 방도 구해 주고 몸 괜찮으면 와서 일하라고 했죠. 틈틈이 일했어요. 돈 나오면 동료들에게 먹을 것을 사다 주기도 했고요. 그래도 고시원 방에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로웠어요. 가족들하고는 연락이 끊긴 지 이미 오래였고.”

“내 딸입니다, 예쁘죠?” 오씨가 지갑 속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가족을 되찾고 싶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오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술을 마시다 서울 서소문 고가 차로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가족관계증명서에는 그의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사망시기: 2015년 11월(사인:불명)


▶관련기사
① 경제력 상실하며 가족까지 해체…사회서 단절된 삶
② “복지 사각 중년층 무연고자, 일자리·주거 지원해야”


|안산 해안가서 숨진 대졸 53세 황씨
20대에 머리 다친 후 환청 들려
회사 생활 못해 절도하다 교도소로
좌판 장사하는 게 희망이었는데 …

인터뷰 내내 황씨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자꾸 귀에서 환청이 들린다고 했다.

언제부터 몸이 안 좋으셨던 거죠.
“20대 때였지. 내가 이래봬도 대학 졸업하고 해병대까지 간 사람이야. 근데 제대하고 나서 동네 건달 형과 시비가 붙어 머리를 맞았어. 그때부터 소리가 들렸던 것 같네.”
증세가 어땠나요.
“늙은 노인이 자꾸 명령을 해. 환청이 들려서 그랬다고 하면 핑계일지 모르지만 못된 짓도 많이 했어. 절도 같은 거였지. 2000년께 교도소에 들어갔는데 정신병 진단을 받아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치료를 받았어.”
가족들은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형제는 5남매였는데 다들 살기 바쁘니 뿔뿔이 흩어졌지. 사실 마지막까지 형제들을 꼭 찾고 싶었는데….”
출소하고 나서 어떻게 생활했나요.
“노숙했어. 노숙인 쉼터에 머문 적도 있는데 내 몸 상태를 상당히 안 좋게 봤는지 병원에 입원시키더라고. 2년 전이지. 퇴원할 때가 되자 병원에선 ‘또 노숙을 할 위험이 크다’며 날 서울 용답동의 노숙인재활센터로 보냈어.”
재기하려는 노력은 안 해보셨나요.
“서울시가 지원하는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공원 청소 일을 했어. 조금씩 돈을 모으면 나중에 좌판 장사라도 하며 먹고살겠다 싶었지. 그게 내 마지막 목표였어.”

황씨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센터를 무단 이탈한 그는 다음 날 경기도 안산의 해안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는 질문에 묵묵부답. 인터뷰는 거기서 끝이었다.

※사망시기: 2015월 12월(사인:자살)

글, 사진=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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