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정당한 권위는 질서 지킴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쉬이.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중략) 퇴로재상(退老宰相.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재상)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아지 마시오. 개잘량(방석처럼 쓰려고 털이 붙은 채로 손질해 만든 개가죽)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개다리처럼 상다리가 굽은 밥상)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2백여년 전부터 황해도 봉산(鳳山) 에서 전승된 봉산탈춤(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총 일곱 마당) 여섯째 마당 양반춤에 나오는 대화 내용의 일부다.

하인인 말뚝이가 양반들의 허세를 풍자한 대목이다. 여기에 나오는 양반들은 돈으로 양반계급을 사고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당시의 지배계층이다. 이미 서민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이에 비해 말뚝이는 새롭게 성장하는 시민의식의 대변자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마다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적으로 혼란이 오고 치러야 할 비용이 커진다.

권위란 바로 조직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도덕적 정당성을 지닌 다스림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권위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나 특정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일정한 권위가 보장돼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 국정 운영에서 대통령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나라 전체의 비용이 불어난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없으면 자식 훈육에 말보다는 회초리를 들어야 하고,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가르침 자체가 무의미하다. 경찰의 권위가 없으면 교통 위반 딱지를 뗄 때마다 말싸움하느라 시간이 낭비된다.

권위는 비용을 최소화하며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권위가 특정한 사람에게 집중돼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면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주의자(권위주의적 사고)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거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오직 힘으로 누르려 들고, 비이성적인 게 특징이다.

과거 우리 사회의 권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권위주위의 중병을 앓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당한 권위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제다. 행정관청을 포함해 사회 이익집단들이 매사에 권위를 부정한다면 비용 증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존립이 어렵게 된다.

한번 무너진 권위는 다시 세우기 어렵다. 이제 정당한 권위는 인정하고 세우는 사회 풍토를 만들어야 할 때다.

이태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