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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특집 1]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갈린 광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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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에게 기대 접었다지만 안철수에 대해서도 ‘반신반의’… 향후 정치지형 변화와 이슈에 따라 막판에 ‘전략적 선택’할 수도

“대선까지 시간 많으니까 ‘싸목싸목’(‘천천히’의 사투리) 보고 골라야제”

24절기의 첫째 절기인 입춘(立春) 하루 전날인 2월 3일. 차가운 얼음과 바위 틈 속에서 연둣빛의 새순이 자라면서 무등산의 봄은 시작되고 있었다. 산을 찾은 사람들도 힘찬 발걸음으로 봄기운을 맞았다. 광주 시민들이 즐겨 찾는 중외공원 언덕의 홍매화 나뭇가지에도 붉은 빛의 몽우리가 맺혔다. 산책 나온 시민 조주현(44) 씨는 “올해는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 덕에 이미 1월에 꽃이 활짝 핀 가지들도 제법 있었다”고 말했다.

겨울이 잰걸음으로 떠나고 봄이 종종걸음으로 온 광주. 그러나 두 달 앞으로 다가온 20대 총선 이야기만 나오면 빛고을은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했다. 광주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중 하나인 남광주시장에서 만난 자영업자 오영록(46) 씨는 “문재인은 날 샜고, 안철수도 아닌 것 같다”며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호남을 둘로 갈라놓았느냐”고 말했다.

오씨의 말처럼 광주 민심은 야권 분열에 대해 좀처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한편으로는 1여다야(與多野) 구도에 대한 안타까움도 감추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계자는 “그래도 호남의 바닥민심은 대체로 야권의 통합을 원한다. 새누리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도 승부가 어려운 마당에 둘로 나뉘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은 ‘결’이 조금 달랐다. 국민의당 관계자는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에 대한 반감이 결국 국민의당을 탄생시킨 것 아니겠느냐”며 창당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낸 한 지역정치인은 큰 이변이 없는 한, 호남 민심은 더민주와 국민의당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5060세대에서는 문재인에 대한 거부감이, 2030세대에서는 안철수에 대한 불신이 커보인다”며 이렇게 말했다. “총선 끝나도 대선까지는 1년 8개월이나 남았는데 급할 게 없다. 시간 많으니까 싸목싸목 봐가면서 골라야죠.”

“문재인이 한 것이 뭐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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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왼쪽) 더민주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지난해 12월 30일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4주기 추모행사에서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돌아서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같은 날 저녁, 광주의 대표적인 번화가인 상무지구의 한 음식점. 40대 후반 내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3명이 소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취기가 좀 오르자 화제는 이내 정치로 옮겨갔다.

“해도 너무했어. 문재인이 한 것이 도대체 뭐가 있어? 이제 민주당(더민주)은 끝났다.” 한 남성이 술잔을 들어 들이키더니 핏대를 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남성이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표 달라고 할 때만 호남이었지, 그 사람들이 해준 게 뭔데? 이번에는 안철수한테 기대 한번 해볼라고.”

가까이 다가가 이들의 관계를 물었더니 “고교 동창생”이라고 했다. 설을 앞두고 모처럼 술자리를 함께한 것이었다.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한 남성은 “지난 대선 때 호남에서만 표를 몰아주면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몰표를 줬는데도 문재인은 패했고, 그것 때문에 호남이 다시 소외당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랫동안 더민주의 당원으로 활동하다 최근 탈당했다는 이모(50) 씨는 “더민주는 정권교체의 대안이 아니라는 게 지역민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선거에서 매번 패하고도 반성 없는 정당, 폭주기관차 같은 정부·여당을 견제하지 못하는 당은 제1야당으로서 자격이 없다”면서 “이번 기회에 새로운 정당에 힘을 실어 정권교체의 희망을 키워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당초 더민주 간판으로 광주에서 출마를 준비하다 최근 탈당계를 제출하고 국민의당에 입당한 한 예비후보는 “하루에 1000명 이상 만나고 다녔는데 10명 중 8, 9명은 탈당을 권유했다. 어떤 분들은 ‘이번에 야당이 확실히 깨져봐야 제대로 정신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안철수가 못하면 차라리 무소속 후보를 찍겠다’는 분들도 계시더라”고 바닥민심을 전했다.

한상진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의 ‘이승만 국부(國父)’ 발언 등으로 한때 흔들리기도 했지만 여론조사 결과 광주·전남에서는 국민의당이 여전히 더민주를 여유 있게 앞서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 일간지인 <광주일보>가 설 연휴 직전인 2월 2~3일 광주·전남지역 유권자 10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정당 지지율에서 ▷국민의당(42.9%) ▷더민주(28%) ▷새누리당(9%) ▷정의당(2.8%) 순으로 나타났다. 광주에서는 국민의당(41.4%)이 더민주(29.7%)를 11.7%p 차로, 전남에서는 국민의당(44%)이 더민주(26.8%)를 17.2%p 차로 따돌렸다.

정치권 관계자는 “더민주가 문재인 전 대표의 사퇴와 외부 인사 영입 등으로 분위기 반전에 나섰으나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참여 논란 등이 겹치면서 돌아선 지역민심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탈당의원들 받는 것이 새 정치냐?”

바닥민심을 좀 더 읽기 위해 자리를 근처 호프집으로 옮겼다. 이곳에서는 마침 조기축구회 회원 10여 명의 설 연휴 직전 ‘번개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머리 아프고 재미없으니까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 적잖은 관심을 보였다.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김동수(47) 씨는 “선거권을 얻은 뒤로는 단 한 번도 투표를 거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민주당(더민주)은 날이 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철수가 잘할 것 같지도 않아서 문제”라며 “차라리 새누리당 후보한테 표를 줄까 고민도 된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민의당에 합류한 일부 지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민주당이 광주에서 왜 이 모양이 된 줄 알아요? 문재인도 문재인이지만 호남 의원들의 책임도 커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안철수 뒤에 숨어서 문재인 욕만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죠. 그 사람들 받아주는 것이 새 정치래요?”

김씨가 열변을 토하자 좌중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같은 모임의 김영우(52) 씨는 “더민주를 탈당한 현역의원 대부분이 공천을 받는다면 ‘도로 더민주’, ‘호남 자민련’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며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더민주 간판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이번에 국민의당으로 말을 갈아타고 등장한다면 도대체 안철수의 새 정치는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일부 2030세대에서는 야권 분열에 대한 ‘안철수 책임론’도 감지됐다.

직장인 이민수(29·여) 씨는 “안철수가 어떻게 해서든지 당내에서 갈등을 해결했어야 했다. 힘을 합쳐도 새누리당의 과반의석을 저지하기 어려운 현실인데 분당이 말이 되느냐”며 “탈당 후로도 안철수의 행보를 보면 새 정치와는 거리가 있다. 비전과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김대건(38) 씨는 “솔직히 말해서 문재인·안철수 둘 다 마음에 안 든다. 아무리 호남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이 없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호남을 찢어놓고, 무슨 염치로 표를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통합해서 하나로 나아가야 총선은 물론이고, 내년 대선에서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기관 ‘타임리서치’의 박해성 대표는 호남, 특히 광주에서는 선거 막판 표 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박 대표는 “전통적으로 전략적 투표를 해온 광주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에 대항할 수 있는 쪽을 택해 밀어 줄 수도 있는 만큼 더민주와 국민의당 중 한 쪽이 8석 전부를 가져갈 가능성도 있다”면서 “한순간 삐끗하면 양당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스기사] “묻지마 2번 심리가 변수”

여론조사에선 국민의당이 더민주에 15%p가량 앞서지만 총선에선 ‘무승부’ 될 수도
4·13 총선이 삼파전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광주 지역정가에선 2014년 6·4 지방선거 결과가 화제에 오른다. 당시 17개 광역단체장 선거 중 여론조사와 실제 개표 결과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곳이 광주시장선거였기 때문이다.

선거 막판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시장이었던 강운태 무소속 후보가 윤장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10%p가량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윤 후보가 무려 26%p 차의 압승을 거뒀다. 여론조사 결과대로라면 강 후보는 36%p의 역전패를 당한 셈이다.

지역정가 관계자는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의 전략공천이 광주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선거기간 내내 윤 후보가 고전했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안 대표를 살려야 한다는 ‘전략적 선택’이 막판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강 후보 측 관계자는 이 같은 현상을 ‘숨어 있는 묻지마 2번’이라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호남, 특히 광주·전남에서는 선거 당일이 되면 ‘묻지마 2번 심리’가 작용한다. 각종 선거 결과를 분석해보면 이 표가 전체 유효표의 10~15%가량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지금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당이 더민주에 10~15%p가량 앞선다 해도 실제 투표 결과는 박빙일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는 전체 호남 선거구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무승부’를 기록할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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