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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누구나 야근은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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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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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십여 년 전 일이다. 처음으로 형사단독 재판장을 맡게 되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근을 했다. 사건이 워낙 많기도 했고, 사람의 죄를 다루어야 하는 형사재판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한 건 한 건이 다 고민되어 기록을 넘기다 보면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어느새 자정을 가리키곤 했다.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며 법원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나이 지긋한 기사분은 차에 오르는 내 구깃구깃한 몰골을 흘낏 보며 물었다. “무슨 당직 선 거유?” “아뇨, 야근하느라고요.” “야근? 아니 공무원이 뭔 야근이야? 땡 퇴근하는 맛에 하는 게 공무원 아닌감? 신입 9급인가?” 판사로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저씨.” 난 맞장구를 쳤다. 장난기도 살짝 발동하고, 구수한 말투의 아저씨께 응석 부리고 싶기도 했다. “공무원들도 이렇게 야근하고 한다는 거, 국민들이 좀 알아주시면 좋을 텐데 말예요.”

아저씨는 갑자기 정색을 하셨다. “그런 소리 마쇼. 내가 사납금 채우느라고 몇 시간째 쉬지도 못하고 운전하고 있는 줄 알아?” 무색해진 나는 얼떨결에 죄송하다고 웅얼거리고는 창밖만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운전하는 아저씨의 굽은 등에서 풍겨 나오는 무언가가 차 안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내가 감히 철없는 응석을 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뒤늦은 깨달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세상이 온통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분들로 가득한데 내가 어딜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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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그날의 기억이다.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뒤늦게 드는 생각이 있다. 그때 내가 기사분께 철없는 응석을 부린 것은 분명히 잘못이고 개인적으로는 깨달은 바가 컸다. 그렇긴 한데, 누군가는 당신보다 훨씬 더 힘들게 일하고 있으니 모두들 배부른 소리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야근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옳은 교훈일까? 제일 배고픈 사람 단 한 명 외에는 누구도 배부른 소리 말고 입 닫고 있어야 한다면 과연 누구에게 좋을까? 슬프게도 과로라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취급받는 한국 사회에서, 모두가 힘드니까 다 같이 영원히 힘들어야 한다는 상호 저주보다 처지는 다르지만 각자 자기 분야에서 먼저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 저녁 시간이 소중함을 안 만큼 남들도 누릴 수 있도록 도우며 말이다.

의미 깊은 날이지만, 솔직히 직장인에게는 꿀맛 같은 휴일이기도 한 삼일절 아침에 생각해 본다.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