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남자의 책이야기] 신화에 열광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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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놈이 네댓 살 때, 하루는 아기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게 되었다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내 손바닥의 아랫부분을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더니, 그 밑에 튀어나오는 작은 혹 하나를 보고 그것이 알이라는 것이다.

아빠는 알이 하나 있으니 애를 하나 갖게 된 것이고, 그 알이 팔을 따라 가슴으로 올라간 다음 입을 통해 엄마에게 전달된 것이란다. 엄마와 아빠의 결합으로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막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와 전설 속에는 이처럼 황당한 이야기가 수없이 등장한다.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자.

제우스의 애인 칼리스토는 헤라의 저주를 받아 곰이 된다. 제우스는 칼리스토가 아들 아르카스의 창에 찔리게 되자 그 둘을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로 만든다.

그토록 미워하던 칼리스토가 별자리로 신격화되었으니 헤라의 노여움은 어떠했겠는가! 헤라는 바다의 신 테티스를 찾아가 큰곰자리가 하늘에서 맴돌 뿐 바다 밑으로 내려와 쉬지 못하도록 간청하였다.

밤하늘의 별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는 그저 북극성 둘레를 맴돌 뿐이다.

지금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더 이상 팔목의 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더 이상 칼리스토와 아르카스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다 큰 아이의 논리적 사고 속에 아직도 어린 시절의 비논리적 사고가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과학적 사고 속에 그 옛날의 신화적 사고가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의미'(이끌리오)에서 과학적 사고를 통해 황당하고 거짓말처럼 보이는 신화를 현실적 이야기로 풀어 냈다.

마치 프로이트가 꿈을 통해 무의식을 의식 세계로 끌어 냈듯이.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신화적 사고 구조는 프로이트의 꿈 텍스트 또는 무의식과 유사하다'는 말로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SF 영화 '매트릭스'는 세계인의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고 있지만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상품이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어째서 신화적 소재가 각광을 받는 것일까?

인류의 원초적 의식이었던 무의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과학 더 나아가 모든 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가 끊임없이 우리를 열광시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정창훈 과학 저술가

※ 이 칼럼의 필진으로 내정됐던 정재승씨는 개인사정으로 집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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