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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레터] 찻잔 속에 봄이 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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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시인 박남준의 매화 띄운 차.

이윽고 춘삼월입니다. 누구에게나 아득한 봄의 풍경이 있겠지요. 저에게도 가슴 서늘한 춘경(春景)이 있습니다. 얼음 녹고 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남쪽 하늘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리산 남쪽 자락에 내려가면 말입니다. 하동군 악양면에 들어 지리산만 보고 무작정 직진하면 이름하여 동매(東梅)마을, 동쪽의 매화 피는 두메가 봄날 아침의 매화처럼 불쑥 나타납니다. 그 동화처럼 예쁜 이름의 마을에 들어 더 이상 차로 올라갈 수 없는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말입니다. 악양 들판 내다보고 앉은 허름한 집 한 채가 나옵니다. 시인 박남준(59)의 ‘악양산방’입니다.

박남준 시인의 악양산방은 이제 제법 명소 대우를 받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책에서 악양산방이 여러 차례 소개가 되었지요. 산문집 『지리산 행복학교』에 등장하는 ‘버들치 시인’이 바로 박남준 시인입니다. 하도 사람이 찾아오는 바람에 시인이 집비우고 도망 다녔다는 일화도 전해 오지요.

그러니까 바로 이맘때입니다. 이맘때 악양산방에 들면 예의 비범한 ‘꽃놀이’가 펼쳐집니다. 악양산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소주를 짝째 놓고 마시는 패거리들이 ‘악양 매화 쇼’라고 부르는 의례입니다. 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시인이 손수 덖은 차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미리 따 놓은 매화 꽃잎을 꺼냅니다. 아직 입을 다문 덜 여문 녀석입니다. 그 꽃잎을 따뜻한 차에 띄우면, 차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꽃잎이 스스로 몸을 엽니다. 모두가 감탄하며 만개한 매화를, 시인의 꽃 차를 감상합니다. 올해도 찾아와 준 봄을 감사해 합니다.

봄입니다. 꽃 피는 봄입니다.

편집장 손민호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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