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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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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잠옷 차림의 이기택 당시 민주당 총재는 2층 침실에서 1층 거실로 뛰어 내려왔다. 그러곤 대뜸 물었다. “진짜야? 갈 데까지 가는구만.”

20년 전인 1995년 7월 7일 밤. ‘동교동 신당 창당 추진’ 기사를 중앙일보가 가판(전날 저녁 가판대에서 파는 조간신문, 2001년 10월 폐지함)에서 단독 보도한 뒤 북아현동 자택에서 만난 이 총재가 보인 반응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당초의 은퇴 약속을 번복하고 정계에 복귀해 신당을 만들자 이 총재는 하루 아침에 제1야당 총재에서 변두리 야당 지도자가 됐다.
대한민국에서 “3김 청산” 정치인의 대명사였던 ‘이기택’의 정치는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7선의원)가 2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79세. 이 전 총재는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자신을 “영구 야당이고, 야당 내에선 철새”라고 말했다. YS와 DJ 사이에서 ‘외길 타기’를 한 파란만장했던 정치 인생을 그렇게 표현했다.

37년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난 이 전 총재는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상대에 진학했다. 고려대 시절 상과대 학생위원장을 맡아 60년 4ㆍ19 혁명을 주도했다. 67년 7대 국회에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했을 당시 최연소(30세) 국회의원이었다.

79년 신민당 총재 경선 당시 1차에서 낙선한 이 전 총재는 결선에서 YS 지지 선언을 해 당선에 기여했다. 이후 YS와 정치를 함께 했으나 90년 3당 합당 때 결별하고, 노무현ㆍ홍사덕ㆍ이철 등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92년 DJ와 합당해 민주당 공동대표를 맡았지만 대선에서 패한 DJ가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하는 바람에 다시 갈라섰다.

이 전 총재의 비서관을 지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양김이라는 양대 산맥에서 고통도 많이 받고, 외로움도 많이 타고, 무시도 받고, 또 영입 제안도 받아보고…. 외길 타듯이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2007년 대선에 고려대 후배이자 고향 후배인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 한때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2008~11년)을 지냈다. 이후 최근까지 자서전 『우행(牛行)』의 탈고에 집중했다. 자서전 제목은 그의 좌우명인 ‘호시우행’(虎視牛行ㆍ호랑이 눈처럼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소처럼 우직하게 나아간다)에서 따왔다. 이 전 총재의 비서실장을 지내 최근까지 만나왔던 박계동 전 의원은 “별세하시기 전날 밤 10시에 마지막 탈고를 마치곤 ‘아, 큰일 마쳤다’며 흡족해 하셨다”고 전했다.

빈소가 차려진 서울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엔 정의화 국회의장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등 여야 정치인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장례는 4ㆍ19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지면, 박관용 전 의장이 장례위원장을 맡는다. 발인은 24일, 장지는 서울 수유동 4ㆍ19 묘지다. 유족으론 부인 이경의 여사와 아들 성호씨, 딸 우인ㆍ지인ㆍ세인씨가 있다.

위문희 기자 moonbri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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