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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석연찮은 대학 입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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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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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신문제작담당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재미있게 봤다. 주인공들이 대학에 가는 대목이 특히 흥미로웠다. 보라는 서울대를 다녔고, 선우는 의과대학을 갔다. 정환이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개천에서 용 난 듯하지만, 그때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강남의 비싼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길이 있었다.

수능·내신·학생부·논술…도대체 뭐부터 해야 할지
‘응팔’ 주인공, 지금이라면 원하는 대학 갈 수 있을까

70년대 말 고등학교를 다닌 필자의 상황도 엇비슷했던 것 같다. 서울 삼선동에 있는 평범한 일반고를 다녔다. 참고서 여러 권 살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었다. 희망의 끈을 놓을 이유도 없었다. ‘수학의 정석’을 반복해 풀고, ‘에센스 영한사전’에 손때가 켜켜이 묻을 때까지 들춰 보면 됐다. 많은 친구가 원하는 대학에 갔다. 훗날 필자의 반에서 굴지의 게임회사를 창업한 친구가 나왔고, 사법고시에 붙은 친구도 있었다. 경찰대 1기로 들어가 지방경찰청장에 오르기도 했다.

선생님도 일류였다. 국사 선생님은 교과서를 탁 덮어놓고, ‘조선 양반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옛날얘기 하듯 설명했다. 수업을 듣고 나면 마치 조선시대에 사는 것처럼 머릿속에 환하게 정리가 됐다. 대단한 분이었다. 지리 선생님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분필을 막 집어던졌다. 맞는 게 싫어서라도 눈에 불을 켜고 외웠다. 반질반질해진 양복을 입고 박봉에 허덕여도 사명감을 갖고 애쓰는 선생님들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은 대입시험 한 가지뿐이었다. 시험에 실수를 했거나 운이 없다고 생각하면 재수를 택했다. 재수하면서 독하게 공부해 더 잘되기도 했다. 정봉이처럼 4수, 5수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 고만고만하게 살았으니 가정 환경을 탓할 수도 없었다. 본인 스스로 열심히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그때에 비해 지금의 아이들은 더 혹독한 상황에 놓여 있다. 대입 전형이 복잡하다. 그리 공정하지도 않은 것 같다. 수능·내신·논술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된 지 오래다. 이명박 정부 때 인성과 잠재력을 평가해 신입생을 뽑는 입학사정관제(학생부종합전형)를 강화하면서 더 복잡해졌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학교 수행평가를 준비하고, 짬 내서 논술을 배워야 한다. 입학사정관제에 도전하려면 학생부에 쓸 만한 스펙을 쌓아야 한다. 그나마 일반고는 학생 개개인에게 스펙을 쌓아줄 여력이 없어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정공법보다는 요행수가 판을 친다. 봉사활동이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누가 비용을 더 투자하느냐,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합격·불합격이 갈린다. 입학사정관제는 ‘엄마사정관제’라는 조롱이 나온다. 몇 년 전에는 성폭행에 가담한 학생이 ‘인성이 우수한 봉사왕’이란 추천서를 받고 대학에 합격해 충격을 줬다.

대입 전형이 다양하니 강점이 있는 한 가지에 집중하라고? 물정을 모르는 얘기다. 무엇을 잘하는지 가늠하기 힘든 어린 학생들이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 결국 이것저것 하다가 지쳐 간다. 사교육은 그 틈을 파고들어 날로 번창한다. 수능과 내신을 가르치는 학원은 기본이고, 논술학원, 학생부종합전형을 도와주는 학원…. 대입을 어떻게 준비하라고 상담하는 업체도 성업 중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교육비는 저출산의 주요 원인이다.

지금 같으면 ‘응팔’ 주인공들이 희망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이들은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이다. 학생부에 스펙을 채워줄 리 만무한 학교를 다녔다. 집 근처에 논술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고, 있더라도 값비싼 논술학원에 다니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예전처럼 공부만 열심히 하면 안 될까. 물론 성적 위주의 입시 경쟁과 줄 세우기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대학을 요령으로 가는 게 더 큰 문제는 아닐까. 요새 유행하는 말로 ‘흙수저’는 대학 가는 요령도 접해보기 어려우니 말이다. 아이들을 3중·4중으로 괴롭히고, 학력을 대물림하는 듯한 지금의 대입 제도는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정부가 해결할 자신 없으면 대입에서 손을 떼고, 대학에 맡기든지.

고현곤 신문제작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