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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여행’에서 노래여행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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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27면

데이비드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눈 속의 돌무덤’(1807). 슈베르트 ‘겨울여행’ 음반 표지로 사용되었다.

창 밖에 눈이 펄펄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문득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여행’(Winterreise D.911) 노래들이 떠올랐다. 좀처럼 듣지 않던 노래지만 새삼 듣고 싶어졌다. 눈 풍경은 여러가지를 상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동안 강아지와 함께 매일 나가던 동네 산책도 급강하한 기온 탓에 중단되었다. 그 갑갑증이 ‘겨울여행’을 끌어낸 것이다. “누가 창문 유리에 꽃들을 그려 놓았을까? 겨울에 봄꿈을 꾸는 나를 비웃는 것 같네.”제 11곡 ‘봄꿈’에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유리창에 비친 눈 풍경은 꽃그림처럼 화사하다. 이 노랫말이 벌써 봄을 기대하는 내 마음을 빗대는 것 같다.


슈베르트 리트 하면 대뜸 피셔 디스카우가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는 한스 호터나 프리츠 분더리히의 노래에 더 끌린다. 피셔는 목소리나 창법이 리트의 맞춤 노래처럼 너무 깔끔하고 완벽해서 친근감이 덜 느껴지고 목소리가 너무 귀에 익어 새로운 맛이 없다. 무엇보다 베이스 바리톤 호터의 땀과 숨결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가 리트에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베이스 바리톤 한스 호터.

첫곡 ‘저녁인사’(Gute Nacht)의 완만한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벌써 원숙미 가득한 호터의 노래에 이끌린다. ‘겨울여행’에는 외톨이가 되어 들판에 버려진 듯한 고독감에 허덕이는 청년의 갖가지 상념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그려진다. 호터의 목소리와 여유 가득한 창법이 그것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그의 너그럽고 부드러운 음성이 외로운 젊은 혼의 갖가지 표정들을 감싸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스 호터의 절정은 별도의 노래인 ‘음악에 부쳐’(An die Musik)를 그가 부를 때이다. 이 노래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누구나 아는 노래다. 매우 오래 전이지만 한때 나는 골목을 거닐며 서툰 솜씨로나마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이 노래만큼 호터의 목소리, 창법, 그리고 50년을 한결 같은 자세로 무대에 섰다는 그의 삶과 잘 어울리는 노래는 없다. 이 한곡으로 그의 존재감은 충분히 입증된다. 그가 한 없이 깊고 넓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이 노래를 부를 때 나는 버릇처럼 옷깃을 여미고 종교의식 참석자처럼 조용히 귀 기울인다. 이유는 모르나 큰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아마 음악에서 얻는 위안일 것이다. 그가 77, 8세 무렵 어느 가수의 리사이틀이 취소되었을 때 대역으로 등장해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갈채를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스 호터에 비하면 프리츠 분더리히는 리릭 테너로서 한층 감미롭고 화사한 노래를 들려준다. 그의 정겹고 따스한 얼굴표정, 간절한 염원을 실은 열정 넘친 노래는 그에게 각별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나는 분더리히가 부른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을 듣고 깜짝 놀랐다. 티토 스키파나 베냐미노 질리 등 같은 노래의 절정들이 있지만 매끄럽고 기름진 이탈리안 테너와 다른, 정제된 발성의 한층 소박한 분더리히 노래가 색다른 맛을 주었던 것이다.


분더리히는 뛰어난 자질로 20대 초반부터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매력은 무겁고 격식에 매인 아리아들보다 자유롭고 분방한 가곡에서 더 크게 발산되는 것 같다. 베토벤의 ‘아델라이데’, 고결한 여성의 극점을 보여주는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델라이데는 누구일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무심코 떠오르는 질문이다. 문헌상 해답은 있으나 그런 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마음 속에 그것은 언제나 미지의 연인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특정한 종교의 신성을 이 노래에 담은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잘 알려진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썼듯이 상상 속의 고결하고 아리따운 미지의 연인에게 이 노래를 바쳤을 것이다. 같은 작곡가의 두 노래는 쌍생아처럼 닮았고 또 대비된다. 땀에 배인 숨결이 느껴지는 분더리히의 목소리는 뜨거운 갈망을 여과없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한없이 다감하고 웃음이 싱그럽던 그가 36세에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이 몹시 애석하다. 보석 같은 노래의 선물을 주고 그는 짧은 시간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곧 사라진 별과 같은 존재이다.


슈베르트의 ‘실비아는 누구인가?’라는 노래는 베토벤의 ‘아델라이데’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노래는 아기자기한 흥겨움으로 가득하다. 실비아는 누구인가? 문헌상 해답(세익스피어의 『베로나의 두 신사』, 독일시인 에두아르드 폰 바우에른펠드의 시)은 있으나 역시 큰 의미는 없다. 실비아는 아리땁고 지혜 넘치는 여성의 상징으로 나온다. 이 노래에서 자넷 베이커라는 탁월한 가객을 만난 것은 큰 소득이다. 노래도 즐겁지만 그것보다 베이커의 인상적인 가창력에 더 큰 감명을 받았다. 특별한 미성이 아니지만 몸 전체로 발성의 탄력을 조절하는 그의 창법은 우아한 기품과 함께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인간의 몸이 때로 가장 섬세하고 완전한 악기라는 것을 베이커가 실연으로 보여줬다. 이미 노령에 접어든 이 영국 가객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다.


노래를 찾아 듣다 보니 겨울여행이 노래여행으로 변질되었다. 그래도 이 한 겨울 눈 속에서 노래 듣는 즐거움과 새롭게 만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송영 작가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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