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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보다 감동 없는 정치권 영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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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30면

정치권의 인재영입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국민들은 인재영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마 최근 종영된 ‘응답하라 1988(응팔)’보다 감동이 없다는 의견이 많을 것 같다. 응팔은 막장과 선정성을 동원하지 않아도, 재미와 감동이 있는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정치권의 인재영입 릴레이도 감동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응팔’이 주는 성공조건과 상징메시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응팔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은 1988년 당대 사람들의 관심사를 호명하고 공감대를 여는 데 정확하게 응답하고 소통했다는 점이다. 실력있는 무명 배우들이 쌍문동 골목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이웃의 정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당대 시민들이 겪었던 희노애락의 문제에 응답한 것이다. 덧붙여 응팔이 주는 메시지는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와 ‘사랑의 선택기준’에 대해 고민하고 응답할 것을 촉구했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에게 덕선이가 ‘정환’과 ‘택’중 누구를 선택할지, 그리고 덕선이가 택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왜 덕선은 정환이가 아닌 택이를 선택했을까. 덕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요인은 택이의 절박한 올인이 있다. 평생 바둑 밖에 몰랐던 택이는 대국을 포기하고 덕선을 찾으러 갔다. 택이가 덕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정환도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덕선을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정환은 늦었다. 덕선은 듬직한 정환보다 바둑 외에 가진 게 없는 택이를 향해 ‘내가 아니면 누가 그를 지켜줄까?’하면서 절박한 모성애로 응답한다.


응팔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절박한 사정에 대한 절박한 사랑의 응답’이다. 응팔이 아니더라도, 서민들의 절박성은 2012년 대선을 전후로 중도층과 무당파층을 호명했던 ‘안철수 현상’과 2016년 ‘안철수 신당’에 대한 기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안철수 본인을 비롯해서 정치권 전체가 과연 ‘안철수 현상’에 절박하게 응답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인재영입 참사들은 이 절박성에 정치권이 응답하지 않고 있음을 웅변한다. 새누리당이 영입한 6명은 참신성이 떨어지고 이념적으로도 편향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국민의당이 영입한 인사 5명중 3명이 비리 전력으로 물러났다. 더민주당이 영입한 김선현 교수도 표절의혹 등으로 물러갔다.


이 참사는 한상진 국민의당 위원장의 ‘이승만 대통령 국부 논란’과 더민주당의 김종인 전의원 영입 논란에서 더욱 심화된다. 국부는 건국의 아버지란 뜻이다. 국부 호칭은 대한민국 건국의 시점을 1919년으로 보느냐 아니면 1948년으로 보느냐와 관련하여 진보와 보수가 진영논리로 싸우고 있는 민감한 문제다. 한상진 위원장이 진영논리를 벗어나는 중도(中道)의 본령을 이해했더라면, 당연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제헌헌법 전문에 서명한 대로, 1919년을 건국(建國)으로, 1948년을 재건(再建)으로 표현해서 통합적 시각을 제시했을 것이다. 김종인 전의원의 영입도 심사숙고가 필요했다. 더민주당의 입장에서 중도의 확장을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철새 같은 이력은 한곳에서 한 우물을 파는 대다수 서민들의 평균적 눈높이와 정서라는 중도정체성과 충돌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참사가 반복되는 원인은 뭘까. 그 핵심에는 정치권이 안철수 현상에 대해 모르고 있고, 중도정치에 대해 절박하게 응답하지 않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안철수 현상의 본질은 정치권이 과잉된 이념논쟁으로 서민들의 민생을 외면한 것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대안촉구에 대한 절박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안의 핵심은 양극화에 맞서는 중도층과 중산층의 복원에 있다. 정당과 후보의 이미지 개선이 아닌 실제 중도층과 중산층 정당으로의 ‘체질개선’이 요구된다. 근본적인 체질개선의 관점에서 실력 있는 무명의 민생전문가를 적극 발굴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의 절박한 체질개선이 있어야 중도층의 감동 어린 응답도 있을 것이다.


채진원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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