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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선거운동의 자유를 허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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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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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

안철수 의원이 탈당해 새 정당의 창당작업을 시작하면서 그래도 정치판에 뭔가 볼거리가 생겼다. 경쟁자가 생기자 이에 뒤질세라 당명까지 바꾼 더불어민주당은 참신한 인물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에 비해 새누리당은 여전히 당내 분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 정치권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은 주고 있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선거법은 아직 일제시대 못 넘어
등록된 사람만 제한적으로 참여
국민이 나서야 정치가 바뀌는데
유권자는 구경꾼이 되는 게 현실
감시는 강화하되 규제는 풀어야

그렇지만 정치권의 바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민과의 교감 아래 이뤄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부산해졌지만 그저 자기들끼리만 분주한 것 같다는 말이다. 선거를 앞둔 정당 행사라지만 유권자들은 끼어들 틈을 찾을 수 없고, 그저 연극 무대 위 연기자들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 같다. 선거 때가 되면 각 정당은 그들이 선택한 후보자를 내밀고 지역주의나 이념, 정파성을 강조하며 유권자에게 지지를 강요할 것이다.

우리나라 선거에서 유권자는 이처럼 구경꾼이었고 선택을 강요받는 수동적 존재였다. 민주화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유권자는 주체적으로 선거에 참여해 활동하는 존재이기보다 정당의 선택을 추인하는 역할만을 맡았던 셈이다. 물론 지역주의 정치가 이런 제한된 선택의 중요한 원인이지만, 선거운동의 자유를 크게 제약하고 있는 선거법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현행 선거법 아래에서 유권자가 선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투표 행위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아하는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하거나 싫어하는 후보의 낙선을 위해 애쓰는 것은 허용되고 있지 않다. 선거 때가 되면 유권자는 손도 발도 묶인 채 무대 위의 연기자들을 바라만 보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오늘날의 선거법은 시대착오적인 법령이다. 현행 선거법의 근간은 1958년 이승만 정권 때 개정된 선거법이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200만 표 이상 얻으며 선전한 조봉암과 진보당을 견제해야 한다는 데 자유당과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즉 당시 선거법 개정에 양당이 합의한 것은 선거운동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세력의 의회 진출을 막겠다는 두 거대 정당의 기득권 고수를 위한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 뒤로 거의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바뀌지 않은 채 명칭만 달라진 두 거대 정당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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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다 심각한 사실은 당시 개정된 선거법은 서울대 송석윤 교수의 연구대로 1925년 일본 보통선거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民主主義) 시기에 제한적인 수준의 민주주의가 실행되었고, 이때 보통선거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보통선거법은 치안유지법과 함께 제정되었다. 보통선거법의 제정은 결국 선거운동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통해 정당정치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법은 파시스트 제국주의 시기인 1934년 개정을 통해 사전 선거운동의 금지와 선거운동에 대한 포괄적 금지조항을 추가했고, 이로 인해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는 크게 강화되었다. 그런데 1958년 우리나라의 개정 선거법에 이러한 일본의 선거법 규정이 대거 포함된 것이다. 더욱이 5·16 쿠데타 이후의 선거법 개정에서는 법 규정 이외의 방식에 의한 선거운동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추가되어 규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민주화 이후인 1994년 통합선거법 제정으로 선거운동의 전면적 규제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선거운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그 이전의 선거법과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전 선거운동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고 구체적인 선거 운동에 대한 규제 조항도 너무나 많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적어도 선거법에서 우리는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오바마의 선거 유세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오바마의 연설도 훌륭했지만 내게 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세장에서 오바마 지지자들의 모습이었다. 오바마 사진과 ‘HOPE’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스스로 만들어 입은 젊은이들이 그들이 만든 선거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한편으로는 티셔츠·배지·스티커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선거운동이라기보다 흥겨운 ‘놀이’와 같았다. 등록된 선거운동원에 한해 제한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국민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우리 정치는 바뀔 수 없다. 그러나 현행 선거법 아래에서 선거는 정치권만의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고, 유권자는 그저 구경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선거 비용에 대한 감시는 강화하되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는 대폭 풀어야 한다. 선거운동의 자유를 허하라.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한국정치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