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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 이준식의 가시밭 벼슬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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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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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논설위원

학자들의 벼슬길은 가시밭길이다. 학문의 틀에 갇혀 있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면 바깥 세계의 현실이 너무 신산(辛酸)하다. 이론과 정책의 접목도 녹록지 않거니와 관료들의 텃세는 또 어떻겠는가. 그래도 좋은 모양이다. 직(職)을 탐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굳이 탓할 이유도 없다. 탄탄한 학문적 업적과 능력, 뚜렷한 소신을 갖춘 이라면 관료 출신보다 몇 곱절 나을 수도 있다. 논어에서 “학문이 넉넉하면 관직에 나가야 한다(學而優則仕)”고 한 것도 학자들의 이런 장점을 높이 산 터일 게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벼슬길은 어떨까. 지난 12일 제57대 교육부 장관에 취임한 그에겐 걸어보지 않은 길이다. 서울대 공대(기계항공공학부) 교수를 30년 가까이 지낸 공학자인데 전공과 거리가 먼 유치원과 초·중·고의 길까지 챙겨야 한다. 부총리로서 교육·복지·환경·여성·문화체육 등 사회부처도 총괄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서울대 총장 당시 그를 연구부총장으로 발탁했던 오연천 울산대 총장에게 물어봤다. “나이스 가이(nice guy)”라는 답이 돌아왔다. 함께 일해 보니 개혁 마인드와 균형감, 정무 감각도 있더라는 평이었다.

 하지만 첫 행보는 실망스러웠다. 청문회 때 “야무지게 부동산을 굴린 학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차녀 미국 국적과 학자금 무이자 대출, 세금 탈루 의혹까지 겹쳐 평생의 명망과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야당의 무기력과 여당의 도덕 불감증 탓에 넘어갔지만, 정권 초기라면 낙마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이 장관이 거듭 태어나려면 정말 야무지게 일해야 한다. 첫 시험대는 누리과정(만 3~5세 무상교육·보육) 갈등 해소다. 한데 정무 감각이나 추진력이 일단은 물음표다. 취임 즉시 유치원과 어린이집으로 달려갔어야 했는데 열흘 뒤인 22일에 갔다가 성난 엄마들에게 진땀을 뺐다. 안산 시화공업고(14일)와 조치원여중(15일) 등을 먼저 방문했다니, 세상사에 둔감한 관료들이 짠 스케줄만 따라 한 격이다. 아무리 특성화고 격려와 자유학기제 점검이 중요하다 한들 위기의 누리과정 현장만 하겠는가. “교육감과의 갈등을 풀겠다”고 공언한 결기도 공허해 보인다. 기존의 정부 입장만 답습하니 정파에 매몰된 무책임한 진보 교육감들이 고개를 숙일 리 만무다.

 지난 21일 부산에서 열린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총회에서도 그랬다. 유치원 교사 월급이 밀리고, 난방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가 필요했다. 교육감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으니 갈등 조정 능력과 돌파력을 보여줄 기회였다. 하지만 의례적인 인사말과 응답을 하고 40분 만에 자리를 떴다. 다음은 취재기자가 전한 상황.

 ▶이 장관: “교부금으로 누리과정 예산을 꼭 편성해 주세요.”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대통령 공약 사업입니다.”

 ▶이 장관: “교부금도 국고 아니겠습니까.”

 ▶장휘국 교육감협의회장: “(장관) 일정도 있으시니 보내 드려야겠습니다.”

 ▶이 장관: “좋은 결론 도출해 주세요.”

 ▶일부 교육감: “오셨으면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충분히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런데 이 장관은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안 했다. 그리고 기념촬영을 하고 떠났다. 그때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면 뭔데”라는 소리가 들렸다. 부산발 갈등이 증폭되는 순간이었다.

 이 장관으로선 2주간의 벼슬길이 2년보다도 길었을 것이다. 갈 길은 더 멀다. 누리과정을 안정시켜야 하고 국정 역사 교과서와 대학 구조조정, 자유학기제 같은 거친 허들도 넘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순장조가 되리란 보장도 없다. 역대 교육장관 56명의 재임 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만큼 돌풍이 심한 자리다. 공학자 교육장관 1호로 야심 차게 교육개혁을 이끌던 김도연(현 포스텍 총장) 전 장관도 2008년 5개월 만에 물러났다. 턱밑의 관료들이 모교와 자녀 학교에 특별교부금을 갖다 준 일탈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장관도 교육계의 암초를 보지 못하면 어떤 운명이 될지 모른다. 벼슬길은 결코 비단길이 아니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