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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이미지는 오래가지 않는다 껍데기를 깨야 진짜 연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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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오래가지 않는다 껍데기를 깨야 진짜 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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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48)은 ‘척하는’ 걸 극도로 낯간지러워 한다. 그가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표정이 역력한 것은 물론, 어쩌다 진지한 표정으로 찍히면 스스로 “에이, 저 가식 덩어리 좀 보라”고 손사래를 치며 쑥스러워한다.

옆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기자가 ‘사진 멋있게 잘 나오고 있다’고 거드니, 더 쑥스러워하며 ‘야바위꾼’이라 받아친다. 그렇게 농담이 오가는 사이, 이성민이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카메라 셔터가 연신 눌렸고, 그 모습이 지금 여기 있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그에게 새 영화 ‘로봇, 소리’(1월 27일 개봉, 이호재 감독)에 대해 물었다.

딸 유주(채수빈)가 실종된 지 10년, 전자 통신으로 오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억하는 로봇 ‘소리’(심은경·목소리 출연)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딸을 찾아 나서는 아버지 해관(이성민). 그가 보여주는 진득한 부성애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TV 드라마 ‘미생’(2014, tvN)의 오 과장(이성민)이 보여준 따뜻한 인간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 보인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미, 좋은 연기란 무엇일까.

-‘로봇, 소리’에서 해관은 로봇인 소리와 짝을 이뤄 유주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로봇과 연기하는 기분이 어땠나.“배우를 상대로 연기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촬영할 때마다 배우 강진아씨가 와서 소리의 목소리를 내주며 나와 대사를 맞췄거든. 이 장면에서는 소리가 어떤 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해관과 어떻게 대사를 주고받을지 짠 다음, 그에 맞춰 소리의 동작을 조종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기에 생동감도 생기고, 소리가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하는 장면도 생겼다. 완성된 영화에서는 배우 심은경씨가 소리의 목소리를 연기하는데, 그 녹음은 후반 작업 단계에서 했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공지능 로봇인 소리가 극 중 인간들에게 인간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데.“소리가 기계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의지를 지녔고, 그걸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더라. 소리가 해관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인간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 ‘인간은 수집한 정보로 인간을 해친다.’ 그 순간 인간으로서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게 된다고 할까. 투박하고 이기적이었던 해관 역시 소리의 그런 점에 감화돼 점점 인간적으로 변해가는 거다.”

-촬영 내내 소리와 붙어다녀 정이 많이 들었겠다. “촬영할 때 소리의 눈을 계속 쳐다봐서 그런지, 그냥 깡통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아니어도 반려동물 같은 느낌이 들더라.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소리가 봉고차에 실려 가는 걸 볼 때는 마음이 좀 아팠다.”

-유주가 점차 커가면서 아버지인 해관과 사이가 멀어진 것으로 나오는데. “일반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그렇지 않나. 딸이 어릴 때만 해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다가,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더욱이 유주가 스무 살에 실종되고 10년이 지나도록 해관이 유주를 찾는 데 매달리는 건, 실종되기 직전 그가 딸과 심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 때문에 유주가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놓지 못하는 거지. 다행히 난 열여섯 살 난 딸과 여전히 가깝게 지내지만. ”

-딸에게 어떤 아빠인가. “그저 무뚝뚝하고 야단만 치는 아빠가 되지 않으려 많이 노력한다. 여전히 나를 가깝게 대해 주는 딸한테 고마울 뿐이다. 딸이 중학생이 되면서 좀 달라지긴 했다.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내가 재워줘야 했는데 중학생이 되더니 혼자 자겠다고 하더라. 지금도 가끔 무서울 때면 아내와 나 사이에 끼어들어 자는데, 난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웃음).”

-딸이 열여섯 살이면 딱 사춘기 아닌가. “물론이다. 심하게 부딪칠 때도 있다. ‘로봇, 소리’ 찍을 때 특히 그랬다. 그래서 내가 딸애한테 이렇게 말했다. ‘넌 지금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어. 뼈도 커지고 뇌도 커지고 모든 게 변하니까 아주 힘들 거야. 헐크가 변신할 때 괴로워하는 것처럼. 근데 어른들도 나이를 먹으면 갱년기라는 변화를 겪어. 갱년기도 사춘기처럼 힘든 거야. 네가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 뒤로는 딸애가 욱하다가도 ‘미안’ 하면서 물러서더라.”

-좋은 아빠네.“배우는 연기를 하면서 여러 인물, 여러 입장이 되지 않나.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딸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딸의 처지와 감정을 내가 먼저 헤아려주고 싶다. 근데 딸애가 나중에 어떤 남자애 하나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 남자애 한 대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웃음).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어우, 성질 나. 딸 가진 아버지들은 다 똑같은 마음일 거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내가 딸애한테 ‘너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아빠랑 같은 동네 살면 어때?’ 하니까, 딸애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아빠 시골 살 거야?’ 묻더라. 그래서 내가 ‘응’ 했더니, 바로 싫다고 하더라고. 푸흐흐.”

-‘미생’의 오 과장이나 ‘로봇, 소리’의 해관도 그렇고, 이성민 하면 인간미 넘치는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런 인물을 연기할 때 제일 편하긴 하다. 나한테 그런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길을 가다 날 알아본 사람들은 대개 ‘오 과장이다’라고 하지, ‘이성민이다’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도 사람들이 나를 오 과장으로 기억하는 게 더 좋다. 반대로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꼴도 보기 싫은 인물도 연기해 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왜 안 되는 걸까. “난 악역을 하려면 ‘공사(工事)’가 많이 필요한 것 같다. 한국영화의 악역 대부분은 등장할 때부터 사나운 모습을 해야 하는데 난 그게 잘 안 된다. 그게 내 숙제다. 외모가 풍기는 인상과 상관없이 극 중 상황이 그 인물에게 섬뜩함을 입히는 악역이라면 해 볼 만한데. 왜, ‘황해’(2010, 나홍진 감독)에서 캄캄한 화면에 누군가 때리고 맞는 소리가 들리다 불이 탁 켜지면, 피칠갑을 한 면가(김윤석)가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있지 않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에단 코엔·조엘 코엔 감독)의 안톤(하비에르 바르뎀)도 별것 안 하는데,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간인지 소름 끼치도록 느껴지지 않나. 그런 악역을 해 보고 싶다.”

-악역이라면 지난해 ‘손님’(김광태 감독)에서 마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촌장을 연기하지 않았나.“‘손님’은 많이 아쉬운 작품이다. 나름 공들여 연기한 캐릭터였는데, 영화가 시나리오와 많이 다르게 나왔다.”


-대중은 당신이 ‘미생’의 오 과장처럼 인간미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을 때 가장 열광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미란 무엇인가.
“인간미란 결국 보편성 아닐까. 내가 어떤 인물을 연기할 때도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변호사 역이라 하면, ‘가장 보통의 변호사는 어떤 모습일까’ 질문하는 거다. 실제로 변호사들을 만나 보면 ‘변호사’ 같이 생긴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가 떠올리는 고정관념이 따로 있는 거지. 그들도 변호사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고, 누군가의 친구고, 평범한 동네 아저씨다. 나는 바로 그런, 아주 평범한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야 내가 연기하는 인물을 관객이 친근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악역에는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인상이 ‘가장 보통의 인물’을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모의 특징이 없다는 게 배우로서 약점이었다. 상대적으로 눈에 안 띄니까. 딱 봐도 외모에서 강한 개성이 풍기는 배우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보니 외모가 평범하니까 오히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여전히 악역은 해내기 힘들지만. 그 한계를 극복해 보고 싶다.”

-외모의 한계를 극복하는 연기, 꼭 한 번 보고 싶다. “난 연기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화에 할머니가 지하철에서 껌을 파는 장면이 필요하다 치자. 실제로 그런 분을 모셔다 찍으면 사실감이야 살겠지만, 그건 연기가 아니다. 할머니가 아닌 배우가, 할머니처럼 보이도록 뭔가를 해내는 게 바로 연기다. 그런데 요즘 한국영화는 대개 배우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어떤 배우의 어떤 이미지가 반짝 눈에 띈다 싶으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그 이미지를 가져다 쓴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그게 식상하다고 불평한다.

그 배우가 지닌 고유한 이미지 말고 다른 모습을 연기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배우 스스로도 도전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 색다른 도전과 변신이 많아져야 한국 영화계의 연기가 풍요로워진다. 이미지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배우 스스로 껍데기를 깨야 한다. 틸다 스윈튼이 바로 모범 답안이다. 우아한 이미지의 그가 ‘설국열차’(2013, 봉준호 감독)에서 뻐드렁니의 악독한 메이슨 총리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웨스 앤더슨 감독)에서 꼬부랑 할머니로 얼마나 놀라운 변신을 했는지 보라.”

-그래서인가. 최근 출연작을 살펴보면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 ‘관능의 법칙’(2014, 권칠인 감독), 한국형 서부극 ‘군도:민란의 시대’(2014, 윤종빈 감독, 이하 ‘군도’), 롤플레잉 게임 같은 액션영화 ‘빅매치’(2014, 최호 감독), 판타지 공포영화 ‘손님’ 등 색다른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 많은데. “‘군도’ 빼고는 다 흥행이 안 됐다. 하하. 이제는 흥행하는 작품을 해 보고 싶다(웃음).”

-최근 출연작의 연기에 대해 말하자면, ‘군도’와 ‘미생’의 연기는 좋았지만 스릴러 ‘방황하는 칼날’(2014, 이정호 감독)에서 보여준 현실적인 형사 억관의 연기는 필요 이상으로 힘을 준 느낌이었다.“‘군도’는 딱 내가 생각한 대로 영화가 나왔다. ‘방황하는 칼날’은 후회가 많이 남는다. 시나리오의 억관은 그렇게 무거운 인물이 아니었는데. 한 작품에 짧게 등장하는 조연을 주로 하다, 한 작품에 긴 호흡으로 등장하는 역을 맡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비중이 큰 역일수록 내 연기와 극 전체의 균형을 살피면서 어떤 순간에는 힘을 주고 어떤 순간에는 힘을 빼야 한다는 걸 모르고, 이전에 조연을 했을 때처럼 순간순간 그 인물을 농축해 보여주는 식으로 연기했다. TV 드라마는 한 회씩 찍고 모니터하면서 다음 회에 잘못한 걸 만회할 수 있는데, 영화는 그게 안 되니까 한 작품 한 작품 해나가면서 배워나가야 하는 것 같다.”

-연극 무대부터 시작해 관객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지 수십 년인데, 사진 찍는 건 왜 이렇게 쑥스러워 하나. “연기는 극 중 상황이 있으니까 그걸 좇으면 되는데, 사진 찍을 때는 영혼이 없어지는 느낌이다. 셔터 소리가 잠깐 멈추는 순간이 너무 어색하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다. 재킷 주머니에 손도 넣을 줄 알고 말이야(웃음).”

글=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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