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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 인턴은 알바생 아닌 미래 ‘정치 자산’ 대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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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5 면

독일 해적당 당원들이 2009년 베를린에서 당 깃발을 들고 정부의 인터넷 통제 강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해적당은 독일의 청년세대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사례로 꼽힌다. [AP]

요즘 정치권은 청년세대를 향해 러브콜을 연신 보내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11일 “그동안 젊은 그룹에 우리가 취약했는데 30~40대에 열심히 살아오고, 개혁성과 참신성을 갖춘 인물을 중심으로 1차 영입을 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은 34세의 여성 디자이너 김빈씨를 영입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 일부 인사를 영입하는 수준일 뿐 청년세대의 정치 참여를 북돋을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세대의 정치 참여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도 제자리걸음이다.


지방의회 선거에 의무적으로 35세 이하 청년을 한 명 이상 공천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더민주 원혜영 의원 대표발의)도 19대 국회 처리가 어려워졌다. 젊은 정치인들 사이에선 “외부에서 수혈만 할 것이 아니라 젊은 정치인들을 당내에서 체계적으로 기르는 시스템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SUNDAY는 청년세대 정치를 키울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 봤다.


더민주 조경태 의원실 비서관 공인경(33)씨는 2006년 여름 미국 의회에서의 인턴 근무를 시작한 첫날 오리엔테이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여러분은 10년, 20년 후 미국 정치의 미래입니다. 여러분 중에 미국의 대통령·장관·상원의원·하원의원이 나옵니다. 저도 20년 전 여러분처럼 의회 인턴이었고 청년 당원이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미래가 저이고, 꿈 많은 청년 시절의 제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밋 롬니가 의회 인턴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2년 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 공씨는 “미국 의회 외에 독일 연방 상원에서도 인턴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미국과 독일에선 현역 정치인이 대학생 인턴과 상담하고 이들의 의견도 듣는 자리가 정기적으로 마련된다”며 “청년세대를 미래의 정치세력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국회에선 인턴을 소중한 미래자산으로 생각하기보다 업무를 도와줄 아르바이트생 정도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에서 ‘청년세대=미래의 정치세력’은 단순히 수사(修辭)로 그치진 않는다. 그들을 차세대 리더로 키워 내는 시스템이 뒷받침된다. 그 핵심은 바로 교육이다. 독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독일의 정당은 청년정치 조직을 운영한다. 14세부터 35세까지의 청년이 가입할 수 있다. 평소엔 학교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틈나는 대로 당원 활동을 한다. 방학 때는 의회 인턴 경험을 쌓고 선거기간 중엔 자기 당 후보의 캠프에서 선거운동을 돕는다. 또 독일 정당은 청년정치 조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청년 당원에게 장학금을 준다.


독일 정당 14~35세 청년 정치조직 운영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은 정당의 청년정치 조직과 함께 독일 청년세대 정치 인프라의 양대 축이다.


독일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군 복무기간 중에도 정치교육을 받는다. 이후 사회로 진출해서도 본인이 원할 경우 정치교육을 신청할 수 있다. 연방과 주정부는 정치교육원을 운영한다. 정당도 정당이 설립한 재단을 통해 정치교육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학교를 근간으로 국가·정당·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기업이 시스템으로 연결된 평생교육 구조다.


교육 내용은 시민으로서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고상두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정치학) 교수는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닌 선거를 통해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적절한 민주주의 정치교육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독일 현지에서 정치교육 현장을 참관한 경험이 있는 송창석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치·사회 이슈를 주제로 삼은 뒤 찬반 논쟁을 벌인다. 강사는 교육을 진행하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찬반 이슈일 경우 양측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 있게 소개한다”고 말했다.


독일에선 국가와 정당이 직접 정치교육에 참여하다 보니 공정성 논란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1976년 교육학자들이 모여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맺게 된다. 강사가 학생에게 특정 견해를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입장에서 가능성과 대안을 언급하도록 하는 정치교육의 원칙이 이때 세워졌다.


정치교육이 왜 중요할까. 송 선임위원은 “한국에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아는 사람이 적다”며 “독일은 정치교육을 통해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고 어떤 경로를 거쳐야만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이를 통해 청년세대가 정치를 시민생활의 일부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독일 청년세대는 기존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을 위한 정당을 스스로 만든다.


녹색당은 좌파인 사민당이 분배만 중시하고 환경을 소홀히 하자 80년 환경운동가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졌다. 창당 주역들은 페트라 켈리(당시 33세·이하 창당 당시 나이), 루카스 베크만(30), 루돌프 바로(45), 안트예 폴머(37), 요슈카 피셔(32) 등 상당수가 30~40대였다. ‘기존 정당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대변인을 제외한 고위 당직을 없애고 ▶비례대표 임기를 절반으로 자른 뒤 의원들을 교체하며 ▶당직이나 공천의 최소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등의 다양한 실험을 했다. 83년 당시 서독 총선에서 득표율 5.6%를 거둬 창당 3년 만에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대안정당 녹색당의 대안이 된 해적당 해적당은 인터넷의 모든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하기 위해선 불법 다운로드도 허용하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정당이다. 2011년 9월 베를린 주 지역선거에서 8.9%의 표를 얻어 원내 진입정당이 됐다.


당원의 대부분은 30대다. 해적당은 제도권에 진입한 뒤 ‘환경 우선 도그마’에 사로잡힌 녹색당의 지지층을 끌어들이면서 성장했다. ‘대안정당의 대안정당’인 셈이다.


고상두 교수는 “독일은 대안정당이 나오면 기존 정당이 대안정당의 정강이나 정책을 수용한다. 2011년 보수 정당인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독일의 모든 원전을 폐쇄키로 결정했는데 이는 녹색당의 반원전 정강을 흡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독일의 청년세대 정치 참여는 일종의 ‘창업 민주주의’라 불릴 정도로 적극적”이라며 “정치교육 등 인프라가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영국의 정당 중 가장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지는 보수당도 청년세대 정치인을 적극 키운다. 전 보수당 당수 윌리엄 헤이그(55)가 대표적이다.


그는 16세 때인 77년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마거릿 대처를 지지하는 연설로 깜짝스타가 됐다. 헤이그는 이후 옥스퍼드대에 진학한 뒤 대학 내 ‘보수당 학생회(OUCA·Oxford University Conservative Association)’에 가입했다. 89년 보선에 당선한 뒤 보수당의 중요 정치인으로 성장한 헤이그는 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한 뒤 당수로 선출됐다. 당시 36세 때였다. 보수당에선 그 말고도 OUCA 출신 유력 정치인이 많다. 차기 주자로 불리는 테리사 메이나 보리스 존슨도 OUCA 멤버였다. OUCA는 매주 한 차례 포트 와인을 마시면서 정책을 토론하는 ‘포트와 정책(Port and Policy)’이란 모임을 연다. 유력 정치인들이 초청되는데 전·현직 총리들도 대상이다.


프랑스는 94년부터 매년 전국 각지의 어린이를 하원에 불러 ‘어린이 의회(le parlement des enfants)’를 연다. 참석 어린이들은 의원 자격으로 어린이 권리를 보호하는 입법활동을 한다. 논의된 법안 가운데 우수 법안 3개는 실제 본회의에 상정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도 4개나 된다.


최유성 가톨릭관동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는 “한국의 보수 정당은 청년세대를 상대 당(진보 정당)의 지지자로만 여기고, 진보 정당은 청년세대가 당연히 자신들을 찍어 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권이 청년세대를 소홀히 하는 면이 있다”며 “독일 등 선진국 사례를 참고해 한국식 정치교육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청년정책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재영(41) 의원은 “한때 대학의 총학생회가 청년세대의 정치교육과 정치 참여 통로였지만 지금은 환경이 달라졌다”며 “우리도 청소년의 정당활동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더민주의 청년위원장인 정호준(45) 의원은 “정당이 청년세대를 일상적으로 트레이닝시키는 청년아카데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철재·추인영 기자, 런던=고정애 특파원?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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