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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전공·이념 ‘묻지마’ 인재 영입 예술가와 장인 뭉쳐 놀라운 창의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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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24면

1926년 바우하우스 교사 옥상에 모인 교수진 모습.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왼쪽서 일곱 번째)를 비롯, 그가 초빙한 외국인 교수인 모호이너지(왼쪽 네 번째), 칸딘스키(오른쪽 다섯 번째), 클레(오른쪽 네 번째), 파이닝거(오른쪽 세 번째)가 보인다. [bauhaus art as life]

경영자들이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읽는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노력할수록 방황을 하는 존재이지만, 그 방황의 끝에는 구원과 희망이 있다’는 구절에서 경영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독백에서도 경영의 딜레마와 의사결정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가 있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문학에서 희로애락, 증오, 회한, 연민, 희망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 공통의 문제를 다루고 공감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특징이 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에 출간되자마자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독일 문학에 대한 열풍을 불게 만들었다. 한 젊은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다루었기에 시간과 국경을 넘어 1960년대 일본에서 신격호라는 청년에게도 큰 감동을 줘 롯데라는 이름으로 창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문학은 비전과 판타지를 통해 인류를 미래로 인도하는 징검다리 역할도 한다. 월트 디즈니라는 한 가난한 미국 청년은 다락방에서 미키 마우스·도널드 덕 같은 재미있는 만화를 그렸고 그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 그는 마침내 어린이들의 꿈속에서만 존재했던 상상의 나라 ‘디즈니랜드’를 건설하여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기적을 사람들에게 선사했고, ‘테마파크’라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인문학과 경영학이 만나 조직의 성공과 문예 부흥의 시너지를 창출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다. 그 첫 번째 사례로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이념이 어떻게 20세기 디자인 혁명을 일으키고 기업경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1 1920년 당시 바우하우스 학생들의 작품. 매우 현대적 감각의 혁신적 디자인이 담겨 있다.

그로피우스, 구사일생 후 인생관 변화‘건축의 집’이라는 이름의 바우하우스는 1919년 4월, 독일 중부의 소도시 바이마르에서 미술과 공예를 통합한 학교로 문을 열게 된다. 후일 ‘20세기 디자인혁명의 산실’로 불리는 학교는 발터 그로피우스라는 당대 저명한 건축가가 초대 교장을 맡음으로써 가능했다. 그가 바우하우스를 통해서 디자인혁명을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로피우스라는 혁신적 리더의 시대 변화를 꿰뚫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의 명문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건축가로 일하던 중,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31세의 늦은 나이에 군인이 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됐다. 어느 날 적의 포탄이 그의 참호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그는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다. 혼절한 상태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누군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조되는 경험을 한 그는 인생관에 큰 변화를 겪게 됐다.

2 바실리 의자. 바우하우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20세기 모더니즘의 아이콘이다.

전쟁에서 돌아 온 그의 조국 독일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패전의 멍에를 쓰고 영토를 빼앗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에서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 불안으로 나라의 장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로피우스는 혼란한 사회를 구원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예술을 통해 실현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 자리는 그에게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공예학교와 예술학교를 통합함으로써 장인과 순수 예술가, 표현주의자와 실용적 기능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 획기적인 시험을 감행하였고, 이것이 디자인혁명의 기폭제가 됐던 것이다.

4 바우하우스 최초 학교건물. 현재 바우하우스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극단적 사조에 휩쓸리는 것은 막아둘째,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운영하면서 국적·전공·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다양한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고 활용했다. 살롱문화에 젖어 장인들을 멸시하던 순수 예술가들이나 공방 속에서 오로지 주문받은 대로 생산만 하던 기술자와 장인들이 바우하우스라는 한 공간 속에서 구성원이 되어 협업을 하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스위스·헝가리 등에서 활동하던 뛰어난 예술가들, 예를 들면 칸딘스키, 클레, 파이닝거, 실레머, 모호이너지 같은 외국인 인재들을 교수로 채용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들의 국적과 인종, 정치 이데올로기는 문제 삼지 않고 능력 위주로 등용한 것은 당시 관행에 비춰볼 때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셋째, 그로피우스는 학교 운영에 있어서 예술가들의 조화와 협력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을 혼란에 빠뜨린 사회주의 운동이나 혁명주의, 전통적 로마네스크 장식예술 등 극단적인 사조에 휩쓸리는 것을 지양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미술과 조각, 기술과 실용의 통합인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그의 학사운영 방침에 따라 학생들은 전공과 상관없이 입학 후 일정기간 동안 예술의 기초가 되는 기본과정을 공통 필수과목으로 수강토록 함으로써 미술·조각·건축·기술을 아우르는 융복합 교육을 실시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예술의 장르들이 서로 고립된 채로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의 ‘바우하우스 실험’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융복합을 통해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예술가들간의 협력이 이루어졌고,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촉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5 박물관 내부 모습. [사진 김성국]

넷째, 바우하우스는 내면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 당시 풍미하던 인상주의는 사물의 외형을 주로 묘사하는 예술 사조였다. 표현주의자였던 그로피우스는 사물의 외면보다는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내면의 세계를 중시했다. 즉 사물을 자세하고 아름답게만 묘사하려는 경향을 거부하고 대상을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과장하는 방식으로 예술가의 표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선도해 나갔다. 그리하여 과거 획일적이고 분리된 디자인보다는 인간의 창의력과 유연성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장려함으로써 세상에 없던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고 디자인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다섯째, 바우하우스는 디자인의 실용성과 경제성을 강조했다. 바우하우스는 창립 초기부터 지방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항상 자금난에 시달렸다. 예술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물감과 재료가 필요했지만 전쟁 직후 독일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재료 구입이 원활하지 못했다. 고급 재료들은 대부분 영국 등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물자 확보가 어려웠고 가격도 비쌌다. 이러한 어려움은 바우하우스 구성원들로 하여금 오히려 창의력을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리공예처럼 과거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재료를 주변에서 발굴해서 참신하면서도 실용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도 작품 전시회를 수시로 개최해서 시민들이 와서 작품을 보고 직접 구매할 수 있게 함으로써 부족한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과거 귀족들이 쓰던 과도한 장식의 로코코나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가 예술제품들은 소비자들로부터 점차 외면을 당하는 반면,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단순미가 있고 실용적이고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들이 인기리에 판매되면서 바우하우스의 혁신 디자인은 생활밀착형 제품으로 서민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됐다. 한 때 유럽을 풍미하던 이른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은 배척되었고 공개된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멋있고 실용적인 ‘바우하우스 디자인’이 유행을 타게 됐다.

3 그로피우스가 직접 설계한 바우하우스 데사우 교사 건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폐교된 뒤 디자인 이념 세계로 확산바이마르에서 탄생하여 꽃을 피운 바우하우스는 1925년 교사를 데사우로 옮겨 발전을 계속하다가 1932년 수도 베를린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나치정권은 비전통적이고 비독일적인 바우하우스 운동을 반체제적이고 과격한 예술운동이라고 위험시했다. 정권의 탄압이 계속 되면서 1933년 바우하우스는 창립 14년 만에 폐교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폐교라는 불행은 런던과 파리·미국 등지로 망명한 교수나 졸업생을 통해서 바우하우스 이념이 오히려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독일을 떠난 그로피우스는 후일 미 하버드대학에 영입돼 하버드대학 디자인대학원의 건축학과 학장으로 부임했고, 자신의 제자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바우하우스 운동을 부흥시켰다. 모호이너지를 비롯한 다른 교수와 제자들도 시카고에 대거 정착하면서 시카고가 미국 현대 건축디자인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바우하우스 초기 전시회 포스터. 1923년

바우하우스 사람들은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창의 인재들이었다. 이들의 혁신적 디자인 이념은 독일을 떠나 세계 각지로 전이되면서 글로벌화된 운동으로 발전돼 나갔다. 96년 전 시작된 바우하우스 운동은 21세기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경영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오늘날 거의 모든 조직에서 융복합과 창의력이 생존 전략으로 강조되고 있다. 경영자들은 이색적이고 창의적 인재들을 영입하여 다양성과 보편성 속에서 조화와 통합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이념은 컨버전스 시대에 융복합을 통한 창조적 경영을 추구하는 오늘의 경영자들에게 또 다른 지혜를 주고 있다.


김성국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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