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그들을 떠나 보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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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나라당 최병렬체제가 출범하자마자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진보파 의원들이 탈당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崔대표는 이들에게 개혁을 할테니 기다려달라고 만류하고 있다. 나는 한나라당이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들을 붙잡을 것이 아니라, 떠나 보내야 한다고 믿는다.

한나라당 전신이라 할 수 있는 5공의 민정당 시절부터 약방의 감초처럼 진보세력을 영입해 국회의원 몇석을 주었다. 그 전통은 3당통합을 거쳐 YS.이회창 시절까지 계속됐다. 최근에는 이 진보세력이 만만치 않아 통일문제 등에서는 전혀 상반된 목소리를 내어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었다.

왜 보수정당에서 진보세력을 영입해야 했는가. 명목상은 정당이 사회의 여러 세력을 대변해야 국민정당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 이유는 한국 보수정당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 열등감의 핵심은 도덕성 부족이었다.

DJ정권 이전까지 한국 여당은 일방적인 보수주의였다. 진보와 보수가 경쟁할 여건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정권이 계속 보수당으로 이어지면서 부패하게 됐고 그로 인해 한국 보수주의는 부패와 동일시 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보세력은 부패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 인식에는 보수는 부도덕하고, 진보는 도덕적인 것으로 각인 될 수밖에 없었다. 보수정당이 진보세력을 끌어 넣은 이유는 그 진보세력을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깨끗하게 세탁코자 하는 위장전략이었다.

그렇다면 보수는 비도덕적인 세력이고 진보는 도덕적인 세력인가. 그렇지 않다.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은 개인에 달린 문제다. 보수도 부패하고 진보도 부패한다. DJ정권을 돌아보라. 개혁을 특허낸 것인양 외치던 무리들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사회정책적으로도 진보가 보수에 비해 더 도덕적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보수주의는 개인주의를 기초로 한다.

따라서 개인 간의 경쟁을 상정한 시장경제는 경쟁의 패배자에게는 매정하며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훨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보인다. 경쟁에서 처진 사람도 모두 같이 잘 살게 만들어 준다 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세상이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사회주의 몰락이 이를 증명한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하나의 철학이며 역사관이지 도덕과 부패를 가름해 주는 잣대가 아니다.

보수주의를 표방한 한나라당은 보수의 얼굴로 도덕적이 돼야 한다. 어설프게 진보세력을 끼워넣어 그들의 이미지를 빌려 도덕적 모습을 갖추려 하면 안된다.

그런 가면은 국민만 혼란케 만들 뿐이다. 보수는 본래 깨끗한 것이다. 보수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남의 탓도 하지 않는다. 자기 책임하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여 성공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뿐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따뜻함이다. 그 따뜻함으로 인해 보수주의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진보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내세운다.

공동체의 책임을 역설하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적 해이는 불가피하다. 나 대신 국가가, 노조가 내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타심 풍토 속에서 진보 정치인은 생존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진보성향의 의원들을 떠나 보내고 자신의 도덕적인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깨끗한 보수주의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세력과 함께 떠나 보낼 사람들이 또 있다.

기름기 번들번들한 얼굴들, 세월이 어떻게 바뀌든 살아남는 뻔뻔하고 두꺼운 얼굴들, 권력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에게는 군림하는 얼굴들, 이런 얼굴들을 함께 떠나 보내야 한다. 국민은 그런 사람들을 보수 정치인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새 인물을 충원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책임의식이 투철하면서 열심히 살고, 공정하고, 윤리적이며, 따뜻한 사람들을 골라야 한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닌 얼치기 정당으로는 안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양분됐다. 이제는 보수든 진보든 노선을 확실히 하여 누가 더 도덕적이고 건강하며, 누가 더 나라의 장래를 맡을 자격이 있나를 경쟁하는 길 밖에는 없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