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예술인들에게 희망 주는 게 문화융성”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1호 16면

“언젠가 내 인생을 적어 내려갈 기회가 온다면 그 책의 한 페이지는 아마도 한 예술행정가의 숨은 노력과 열정을 기록하는 데 할애될 것이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말이다. 강씨는 1999년 ‘무용계 노벨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수상했지만 당시만 해도 발레 불모지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2002년 ‘카멜리아 레이디’ 내한공연의 큰 성공과 함께 그는 대중스타급 인기를 누리게 됐고,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내에서의 위상도 높아졌다.


강수진 성공스토리의 변곡점으로 알려진 이 ‘카멜리아 레이디’ 내한공연의 숨은 주역이 바로 강씨가 언급한 ‘예술행정가’ 이종덕(81) 충무아트홀 사장이다. 당시 갓 민영화된 세종문화회관의 대표였던 그가 제반사정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카멜리아 레이디’ 내한공연을 뚝심있게 추진한 덕에 빛을 본 건 강수진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발레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치솟았고, 오랜 세월 정부 행사장으로 인식되어온 세종문화회관의 예술적 위상도 달라졌다.


1995년 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까지 꼬박 20년간 주요 공연장 CEO로 활약하며 우리 공연문화 발전사를 함께 써온 그가 15일 퇴임식을 끝으로 현장을 떠난다. 63년 문화공보부 공무원으로 공연예술을 처음 접한 이래, 대통령 취임식부터 한센인 마을 봉사까지 ‘공연’이 있어야 할 곳이라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온 힘을 보태온 그가 현역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새해부터는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으로 ‘제 3의 인생’을 시작하는 그를 만났다. ‘대한민국 1호 예술행정가’로서 팔순까지 지치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온 그만의 ‘썸띵 스페셜’이 궁금했다.

1 2002년 월드컵 당시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거리 응원전이 펼쳐졌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무용가 박인자, 배우 박정자 등과 함께 응원에 나섰다.

“밤새 무슨 얘길 할까 고민했어요. 이상하게 월드컵 거리 응원이 자꾸 떠오르더군.”


‘공연계 거목’의 첫 마디는 뜻밖이었다. 수십 년간 공연현장을 지켜오며 그의 가슴을 가장 뛰게 한 ‘사건’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기획한 일도, 공연장을 멋지게 꾸민 일도 아니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 맞춰 세종문화회관 앞에 대형스크린과 무대를 설치해 길거리응원단을 집결시킨 일이었다.


“윤도현 밴드와 같이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죠. 그런데 미국전을 3일 앞두고 미국 대사가 공문을 보내왔어요. 붉은 악마가 겁이 나니 제발 광화문 응원을 피해달라는 거야. 별 수 없이 시장에게 보고하고 태평로 거리거리에 현수막을 걸었죠. 모든 응원단은 시청 앞으로 모이라고. 그래서 수십만 대군이 시청으로 옮겨가게 된 거예요.”


비록 월드컵 응원은 서울광장으로 옮겨갔지만 길거리 응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순간이다. 정부 종합청사부터 미국 대사관까지 썰렁한 ‘관(官)가 1번지’ 광화문 일대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문화의 거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늘 문화의 거리가 됐다. 문예진흥원 이사 시절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조성을 시작으로, 외딴 우면산 기슭이 시민의 공원이 됐고, 허허벌판이던 성남은 인문학 강연의 메카가 됐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매년 여름 창작 뮤지컬 축제의 장이 된다.


“30여 년 전 처음 뉴욕 링컨센터를 갔는데 극장 안팎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관객들의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83년 문공부를 떠나 대학로 문예진흥원에 와서 보니 마로니에 숲을 지날 때마다 휴식공간이 없는 게 늘 아쉬웠어요. 마침 예원학교 이사장이던 기업인 최원영씨가 음악전문지 창간을 도와 달라고 찾아온 거야. 냉큼 공원 조경을 부탁했죠.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과 클래식 잡지 ‘객석’이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그의 발길 닿는 대로 ‘문화의 거리’ 이후 마로니에 공원은 문인협회 백일장 등을 개최하며 문화예술인들의 집합지가 됐다. 기업인에게 문화예술인을 위한 공원 조성을 맡긴 것은 그가 가진 자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산파 노릇을 하게 된 첫 걸음이었다. 예술의전당부터 부임한 공연장마다 제일 먼저 각계 인사를 동원해 후원회를 조직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외국 공연장마다 벽에 후원자 명단이 있는 걸 유심히 봐 뒀다가 예술의전당에 오자마자 실천에 옮겼지. 동기동창인 연세대 송자 총장이 1500억 기금을 마련했다며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라 바로 초대 후원회장으로 추대하고 나부터 월급 털어 회비를 냈죠.”


후원회가 일방적으로 기여만 한 건 아니다. 그는 회원들이 공연장 울타리가 돼주면서 스스로 예술을 알게 된 점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인연 맺으면서 서로 정보교환을 하고 네트워크를 쌓게 된 측면도 있어요. 그들도 직장을 벗어나 시야를 넓히게 된 거죠.”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는 후원회 외에도 예장로터리, 광화문포럼 등 다수의 모임을 조직해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모임이 하는 일은 주로 사회봉사활동. 74년부터 한센인 거주지 성 라자로 마을과 4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그는 봉사현장에서 새로 태어나게 됐다고 했다.


“성 라자로 마을 덕에 육영수 여사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게 됐어요. 환우들과 악수하고 고구마를 까주던 여사의 모습이 지금도 선해요. 추기경도 매년 오셨는데, 그 훌륭한 분이 마지막에 ‘나는 바보야’라고 하셨죠. 정말 바보가 아니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바보스럽게 산다’는 그 순수함을 직접 보면서 스스로 정화되는 걸 느꼈어요. 어릴 때는 깡패들과 어울려 다녔었는데, 사람은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요.”


15일 현역서 퇴임 …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바로 꽃자리” 문화계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폭넓은 인맥을 가진 그는 한때 ‘정치할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88년 문예진흥원 시절 평화의 댐 추진위원회 사무총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명성이 높아지자 당시 정한모 문광부 장관이 “방송국이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가 택한 곳은 당시 침체에 빠졌던 서울예술단이었다. 출세가 보장된 자리가 아니라 자신을 정말 필요로 하는 곳이 ‘꽃자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위해 조직된 서울예술단이 천덕꾸러기로 방치된 상태였어요. 당시 뮤지컬팀만 있었는데 얼른 무용단을 꾸려 해외투어를 나갔지. 미국 5개 도시를 돌면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에 기사가 나오니 국내에서도 주목하더군요. 그 뒤 이어령 장관에게 강력 건의해 예술의전당으로 이사하면서 단원들도 자부심이 생기고 대외적인 위상도 강화됐죠.”


2005년 성남아트센터에 와서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철거민들이 살던 중원구·수정구 등 구도시와 부자 동네인 분당 신도시가 공존하는 성남시는 사회통합이 급선무였다. ‘문화를 통한 화합’이라는 목표를 걸고 낙후 지역의 문화 수준을 올리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예술의 기초는 인문학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거든. 예술의 향기가 아예 없는 곳이니 인문학 강좌부터 시작한 거죠. 우리가 만든 ‘사랑방 문화클럽’을 여기저기서 벤치마킹을 해가더니 전국적인 인문학 열풍이 불더군요.”

2 2008년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당시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엘 시스테마 창시자 호세 아브라우 박사와 함께.

낙후 지역 주민을 위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운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2008년 구스타보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그해 최고의 음악회가 됐다. 창시자 호세 아브레우 박사를 함께 초청해 각종 행사를 주최해 국내에도 엘 시스테마가 널리 알려지게 됐고, 문화재단마다 ‘꿈의 오케스트라’ 운영이 유행처럼 번졌다.


“엘 시스테마에서 두다멜을 가르쳤던 곽승씨 역할이 컸어요. 세종문화회관 시절 서울시향을 지휘하며 날 ‘형님’이라 부르던 그가 성남 국제청소년관현악페스티벌을 맡으면서 두다멜을 부른 거죠. 연주회 말미에 베네수엘라 국기 유니폼을 일제히 객석에 던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3 2006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내한공연 당시 발레리나 강수진과 함께.

창작 뮤지컬 산실 된 충무아트홀 이쯤 듣다 보니 ‘썸띵 스페셜’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혔다.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과 향유하는 사람들을 조건 없이 돕겠다는 일관된 태도에서 모든 업적이 싹튼 것이다. 2010년 일단 은퇴를 선언했던 그가 충무아트홀로 돌아온 것도 그래서다. “도와 달라”며 큰절을 올리는 중구청장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내치지 못했던 것. B급 뮤지컬 대관 위주였던 충무아트홀은 그의 재임 5년을 거치며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제작을 비롯해 뮤지컬 전문 아카데미 설립, 서울 뮤지컬 페스티벌 개최 등 창작 뮤지컬 산실로 거듭났다.

4 충무아트홀이 제작한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2014 더 뮤지컬어워즈에서 ‘올해의 뮤지컬상’ 등 9개 부문을 휩쓸었다.

“문예진흥원 시절 창작예술을 지원하면서 늘 창작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이 있었거든. 여기가 뮤지컬 전문극장이니 뮤지컬 창작을 돕게 된 거죠. 예산이 작으니 콘텐츠진흥원, 문화예술위원회, 서울시의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소문난 애주가였던 그는 2년 전 수술을 받은 후 주량이 줄면서 부쩍 나이 든 것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업무적으로도 문공부 주사 시절부터 늘 주도권을 잡고 일해 왔지만 제일 연장자가 되다 보니 오히려 조심스럽다고. “과거 선배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후배들 입장에서 생각해야겠구나 싶어요. 후배들 자리 하나라도 더 만들어주는 게 내 의무인 것 같고.”


반세기 넘게 현장을 지켜온 입장에서 최근 우리 예술계의 편가르기 현상과 검열 사태 등으로 잔뜩 냉각된 분위기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세상이 변했냐”며 아쉬움을 토했다. “요즘엔 단체장 발령을 1년 넘게 못 내더군요. 아는 사람만 하라는 법 있나요. 능력있는 새 얼굴 발굴이 필요하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줘야 해요. 그러려면 인사 책임자부터 경험과 소신이 있어야겠지. 정부는 ‘문화융성’이라지만 현장에선 온도차를 느껴요. 2기를 맞은 문화융성위원회의 책임이 막중한 것 같아요. 예술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을 많이 다뤄줬으면 합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객원기자·충무아트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