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지배하는 기억 자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0호 29면

기억은 시간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경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경험정보는 망각된다. 이 때문에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도, 어제 만난 친구의 넥타이 색깔도, 그제 먹은 점심 메뉴조차 쉽게 잊는다.


우리의 뇌는 경험하는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정보가 기억정보로 저장되는 과정은 선별적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 경험과 다른 ‘기억의 왜곡’이 발생하고, 나는 ‘경험하는 나(경험자아)’와 ‘기억하는 나(기억 자아)’로 구분 된다. 일주일 전 점심 메뉴로 짜장면을 먹은 나는 경험자아이고, 짬뽕을 먹었다고 착각하는 나는 기억자아이다. 지난주에 친구들과 저녁약속을 한 나는 경험자아이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나는 기억자아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입력된 경험 정보는 뇌 속에 저장되지 않으면 소멸된다. 기억자아는 오직 뇌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에 의존한다. 따라서 모든 착각은 기억자아가 저지르는 오류이자 한계이다. 우리의 뇌는 기억의 망각과 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하고도 사람들의 기억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심지어 우리의 뇌는 외부 자극에 의해 경험하지도 않은 정보를 생성하기도 한다. 한 연구에서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자동차 사고를 녹화한 영상을 똑같이 보여줬다. 연구자는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A. 자동차가 ‘부딪혔을 때’ 얼마나 빠르게 달렸습니까?


B. 자동차가 ‘충돌했을 때’ 얼마나 빠르게 달렸습니까?


A와 B는 단어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 동일하다. 실험결과 사람들은 A보다 B의 질문을 들었을 때 영상 속 자동차 속도가 휠씬 빨랐다고 기억하였다. B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은 심지어 영상에 없던 ‘깨진 유리창’을 보았다고까지 대답하였다. 질문의 맥락에 맞도록 사람들 스스로 ‘기억의 조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기억자아가 착각하면 우리의 뇌는 존재하지도 않는 현실을 만들고 경험했다고 믿는다.


이처럼 기억자아는 오류에 취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위한 판단은 오롯이 기억자아의 몫이다. 만약 기억자아가 없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이라는 남성은 어린 시절에 시작된 간질 발작으로 인해 27살에 해마와 편도체를 포함한 양쪽 내측두엽 절제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그의 기억은 27살에 멈췄다.


수술 이전의 기억은 정상적이지만 수술 이후 벌어지는 모든 일은 곧바로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고,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어가는 얼굴을 보며 의아해 했다. 그는 의사로부터 자신의 증상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의사에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기억자아가 사라지면 인생 자체가 멈춰버린다. 매 순간 세상을 느끼고 숨쉬는 것은 경험자아지만, 순간의 경험을 묶어 인생을 스토리로 만들고 미래를 꿈꾸는 것은 기억자아이다. 비록 불완전·불확실·부정확하지만 기억자아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무엇보다 기억자아는 삶에 대한 만족감을 결정한다.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도 기억자아가 음미할 여유가 없다면 삶의 만족감은 나아지지 않는다. 스쳐간 삶의 경험은 오직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생은 기억자아의 것이다.


최승호


도모브로더 이사 james@brodeur.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