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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유승민에 걸린 주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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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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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대구에서·논설위원

2016년 1월 1일이다.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위험한 퀴즈 세 개로 시시각각의 세계를 열어 본다. ① 어두운 밤을 무지갯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은? ② 석양처럼 붉은색, 생명을 잃을 때 차가워지고 승리를 꿈꿀 때 뜨거워지는 것은? ③ 얼음에 붙는 불, 자유를 허락하면 노예가 되는 이것은? 복수의 주술에 걸린 공주 투란도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왕자들은 수수께끼를 푼다. 풀지 못하면 목숨을 내놔야 한다. 투란도트는 사랑의 대명사다. 야심만만한 사람들에겐 대업이나 대권, 이루고자 하는 큰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대권 다크호스 … 얼음에 불 붙여야 살아
‘박근혜 배신론’ 이재만과 운명 건 승부

 세밑 마지막 휴일인 지난해 12월 27일, 유승민(58) 의원을 대구 오페라하우스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오페라하우스에선 투란도트를 즐긴 흐뭇한 표정의 관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유 의원을 지난해 한국 정치에서 관심을 많이 끈 다섯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한다. 나머지 넷은 김무성과 반기문, 문재인과 안철수다. 이들은 여야의 명실상부한 대권 주자다. 당 대표, 유엔 사무총장, 과거 대선 후보 경력 등으로 차기 대통령이 될 잠재성 때문에 넷의 활동은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유승민은 좀 다르다. 그가 여의도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것은 지위 때문이 아니다. 가치(價値) 정치라는 신상품 덕분이다.

 힘의 숭배, 승리 지상, 세 대결과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권력 정치에 신물을 낸 유권자들이 그가 선보인 가치 정치를 눈여겨봤다. 가치 정치엔 희생이 따른다. 유승민은 가치와 희생을 주제로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말과 글이 되는 드문 정치인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직을 물러나면서 2015년 한국 정치에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숭고한 정신, 박해받는 이미지로 유승민은 차기 대선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런 유승민이 대구동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순식간에 정치생명을 잃을 위기에 빠졌다. 그의 지역구에서 화산 폭발하듯 분출하는 ‘배신의 정치’ 심판론이 유승민을 압박하고 있다. 유승민은 “도망가는 정치는 하지 않는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대통령에게 너무 대든 게 아니냐”는 질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당과 청와대 간 소통이 부족했던 건 아쉽다. 헌법적 가치의 수호는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다”고 답했다.

 배신자 심판론의 진원지는 새누리당의 공천 경쟁자인 이재만(57) 예비후보다. 이재만은 2005년 유승민이 박근혜 대표의 지원을 받아 보궐선거에서 첫 지역 국회의원이 될 때 유 후보의 수행단장이었다. 그 뒤 사정이 달라졌다. 유승민은 3선 의원, 이재만은 재선 동구청장을 지내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좁은 울타리에서 한 살 터울의 두 인물이 10년 이상 부대끼다 보니 은원(恩怨)의 사연이 길다. 이 예비후보는 “내가 정치를 하는 한 유승민과 같이 갈 수 없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는 사람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누가 진실하고 누가 배신자인가. 배신의 정치를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만은 실천, 홍보, 조직, 자금은 물론 지역 인지도에서 유승민에게 꿀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재만에겐 이른바 진박(진짜 박근혜의 사람들)이 붙어 도와주고 있다. 새누리당의 쟁쟁한 의원들이 유승민을 버리고 이재만을 미는 건 끼리끼리 팔이 안으로 굽는 국회의원 문화에선 이례적이다. 출마자를 배신자와 진실한 사람으로 가르는 심판론의 파도가 얼마나 커질지가 유승민의 운명을 판가름할 것이다. 어떤 동네 유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을 너무 심하게 다룬다”고 비판하고 다른 택시 기사는 “대통령이 어려울 때 알 만한 유승민이 도와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승민은 얼음에 불을 붙여야 사는 절체절명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풀고 웃을 수 있을까. 

대구에서·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