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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걷다보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

중앙일보

입력

제주올레 트레킹 12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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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샘과 걷기로 약속한 모든 길을 걸었다. 번외 코스인 10-1 가파도 올레만 남았다. 가파도는 모슬포에서 배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섬이다. 가깝지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와 바람이 거세면 배는 뜨지 않는다. 이번 가파도 길은 심샘과 사이 게스트하우스 최운국 사장님과 한 여인네, 이렇게 다섯 명이 함께 걷는다.

가파도는 청보리가 유명하다. 청보리가 자라는 계절이면 청보리를 배경으로 송악산, 산방산, 멀리 한라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지금은 이미 수확을 끝낸 후라서 섬 전체가 조금 허전한 풍경이다. 꼬부랑 마을길과 해안길을 1시간 남짓 걷다 보니 벌써 섬 전체를 돌게 되었다. 돌아가는 배 시간을 확인하고 최 사장님이 추천해 준 가파도 정식을 먹었다.

그렇게 제주 올레 10-1의 가파도 올레길을 마지막으로 우리가 걷고자 했던 길을 마쳤다. 보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여행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이 시간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할 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감각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바다 향기와 바람의 촉감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불평을 가득 품고 의미도 모른 채 올레길을 모두 걸으면서 길과 사람에 대해 배웠다.

길은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직선, 곡선의 형태를 가진 매체다. 옆집 개똥이네를 알게 해주고 건너 마을 순이네와도 만나게 해준다. 길은 항상 그 자리를 지켰다. 돈 벌러 육지로 나간 아들이 어미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고, 낯선 이가 목적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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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줄지 아직 모른다. 다만 길을 걷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는 방법을 제주 올레를 통해 배웠다. 걷기를 마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그동안 걷느라고 많이 못 먹었던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달다. 기분 탓인가. 저녁 늦은 시간까지 심샘과 최 사장님,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 있던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내가 뭔가 해낸 것 같은 느낌과 자신감 들었다. 단지 걸었을 뿐인데.

앞으로 3개월 정도에 한 번씩 올레길에 새로운 코스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심샘과 나는 올레길이 만들어질 때마다 찾아와 길을 걷기로 약속했다. 이번에는 그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 내가 걷고 싶어서 걷겠다고 대답을 했다. 제주 올레가 모두 이어질 때 그 끝과 시작점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올레를 걸은 보름간의 시간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의 의미를 아직은 모른다 할지라도 난 믿고 싶다. 여기서 나의 올레는 잠시 쉬어간다.

밤이 깊어간다. 취기도 조금씩 올라오고 몸은 나른하고 피곤해진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다. 인사를 하려고 나오던 참에 심샘이 나에게 한마디 던진다.

“야, 진석아. 이왕 걸은 거 우리 카미노도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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