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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개 대학에 성소수자 동아리, 예비 신입생도 가입 문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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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10면

항공대 ‘GAVIATOR’, 연세대 ‘컴투게더’, 중앙대 ‘레인보우 피쉬’, 고려대 ‘사람과사람’, 이화여대 ‘변태소녀하늘을날다’, 서울대 ‘큐이즈’, 성균관대 ‘퀴어홀릭’, 포스텍 ‘LinQ’, 국민대 ‘2km’의 로고(왼쪽 위부터).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큐브(QUV)’에 소속된 대학 동아리들이다.

1995년 3월 27일,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 실린 광고가 학교를 발칵 뒤집었다. 당시 사회학과 대학원생이던 서동진씨가 ‘게이·레즈비언 회원을 모집한다’며 자신의 삐삐 번호를 공개한 것이다. 국내 대학 최초의 동성애자 모임인 ‘컴투게더’의 시작이었다. 학교는 논쟁으로 들끓었고, 광고를 낸 서씨에겐 욕설이 쏟아졌다.


90년대는 우리 사회가 가장 자유롭지 못했던 성(性)에 대한 담론이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대학가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비판은 커졌고, 페미니즘과 성평등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런 변화 속에 금기가 깨지자, 다른 대학에서도 선언이 잇따랐다. 서울대·고려대에서 각각 ‘마음 001’, ‘사람과사람’이라는 성소수자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한국 대학 동성애자 인권협의회’를 결성했다. 꼭 20년 전의 이야기다.

1 올해 초 신학기를 맞아 서울대학교 내에 걸린 ‘큐이즈’의 신입생 환영 현수막. [사진 QUV]

서울대 이어 고대도 레즈비언 학생 대표지난달 서울대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총학생회장이 탄생했다. 선거 기간 중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며 레즈비언임을 밝힌 김보미(23·소비자아동학부)씨다. 며칠 뒤인 지난달 26일엔 고려대 동아리연합회 선거에서 커밍아웃한 이예원(21·바이오의공학부)씨가 부후보로 참여한 선거본부 ‘모람’이 당선됐다. 이씨는 “나는 레즈비언이기 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대표자다. 그렇기 때문에 숨기지 않았다”고 커밍아웃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당선된 김보미씨도 “한국에서 동성애는 아직 어렵지만, 그대로의 내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 지난 1일 일본 도쿄(東京)신문은 1면에 김보미씨의 서울대 총학생회장 당선 소식을 보도했다.

이런 변화는 지난 1일 일본의 도쿄(東京)신문 1면에 소개됐다. 신문은 ‘동성애 이해 서서히…한국에서 명문대 학생회장’이라는 제목으로 “성적소수자에 대한 저항감이 뿌리 깊은 한국에서 이해를 촉진하는 계기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씨는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 ‘큐이즈(QIS, Queer In SNU)’의 회원, 이씨는 고려대 ‘사람과사람’의 회장이다. 대학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생긴 지 20년 만에, 그 일원이 학생 다수의 지지를 얻어 대학의 중심으로 나온 것이다.


김씨의 커밍아웃 직후 ‘큐이즈’는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으면 의문 없이 성소수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됩니다. 큐이즈의 한 회원이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라는 암묵적인 요구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결의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발견은 놀라운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게시했다. 이 글처럼 아직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굳이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김보미·이예원씨의 당선으로 적어도 대학가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보다 선명해졌다.


일부 학교선 부정적 반응, 적대감 심해현재 상당수 대학엔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다. 활동 폭과 공개 여부 등에 차이는 있지만 여느 동아리와 마찬가지로 새 학기에 회원을 모집하고 친목·학술 활동을 한다. 지난해 1월엔 각 대학 성소수자 모임이 참여한 연합체도 출범했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큐브(QUV)’다. 경희대·고려대·서울대·서강대·성균관대·연세대·한양대 등 15개 대학이 “당연한 평등과 인권을 위한 목소리에 힘을 싣고자”란 명분으로 처음 모였다.2년 만에 33개 대학 34개 단체의 연대로 규모가 커졌다.


큐브의 대표이자 중앙대 성소수자 동아리 ‘레인보우 피쉬’ 회장을 맡고 있는 아스토(25)씨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성소수자 동아리가 많지 않았다”며 “2010년 이후 트위터 등 SNS 사용이 늘면서 모임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폐쇄적이었던 이들이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이들은 SNS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활동을 알리고, 정보를 공유한다. 아직 모임이 없는 학교에서도 ‘가천대 퀴어동아리를 만들고 싶은’과 같은 계정을 통해 뜻을 나눌 사람을 찾는 움직임도 있다.


일부 학교는 성소수자 동아리를 정식 동아리나 자치기구로 인정하고 있다. 서울대 ‘큐이즈?(99년), 이화여대 ‘변태소녀하늘을날다?(2002년), 고려대 ‘사람과사람?(2003년), 연세대 ‘컴투게더?(2007년), 서강대 ?춤추는Q?(2013년), 서울예대 ‘녹큐?(2014), 한양대 ‘성적소수자인권위원회?(2014년), 중앙대 ‘레인보우 피쉬?(2014년)다. 찬반 논란 등 진통을 겪었지만, 승인을 받은 뒤 이들은 학교로부터 예산과 공간을 지원받는다. 공식 책자로 홍보할 수 있게 돼 회원이 늘고 저변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학교 및 총학생회의 성소수자 관련 정책에 대한 발언에도 열심이다.


적극적인 행보에 대한 우려도 있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경우 아우팅(의지와 관계없이 성적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 위험이 커지는 공개 활동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정식 동아리 승인을 받은 중앙대 ‘레인보우 피쉬’의 아스토 회장은 “학생 사회의 동의를 받았다는 데 승인과 공개활동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외부로부터 압력이 들어오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수 있는 지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부산대 성소수자 인권동아리 QIP(Queer In PNU)는 신입생 환영 현수막과 대자보가 반복적으로 훼손되자 법학전문대학원생과 ‘표현의 자유 침해 및 혐오 표현 대응팀’을 결성했다. 대학원생 10여 명이 먼저 문제를 제기해 시작된 연대였다.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구체적 행동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도 적지 않다. 현수막이 훼손·도난 당하거나 게시판에 악플이 달리는 일은 부지기수다. 고려대 이예원씨는 “동아리방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거나, 몰래 침입해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학교를 불문하고 생기는 일이지만, 수도권 밖에 소재한 대학일수록 어려움은 커진다.


지난 9월 경북대의 온라인 커뮤니티엔 “XX, 살다살다 퀴어 동아리도 생긴거냐, 미친거 아니냐”는 등의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됐다. 2000년 조직된 이 학교의 성소수자 동아리 ‘키반스(Kivans)’가 적극적 활동을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키반스’ 회장인 나인(25)씨는 “일부 댓글을 전체 의견이라 볼 수는 없지만 보수적인 지역이다 보니 소수자 이슈에 둔감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방에선 서울보다 10년 정도 느리게 인식이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학교 측의 ‘입장’에 따라 활동에 제한을 받는 경우도 있다. 최근 숭실대 성소수자 동아리 SSU LGBT는 학교 측으로부터 인권영화제를 허가할 수 없다는 공문을 받았다. 불허 이유는 “우리 대학의 설립 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내 최초로 동성결혼한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 ‘마이 페어 웨딩’이 상영작에 포함된 탓이었다.


지난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이 헌법상 기본권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에서 첫 동성애 인권운동으로 여겨지는 ‘스톤월 저항’ 이후 약 40년 만에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스톤월 저항’은 경찰이 뉴욕 인근의 ‘스톤월 인’이라는 동성애자 술집을 풍기문란이라며 단속하자 집단적으로 저항한 사건이다. 이를 시작으로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여기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동성애를 수용하는 젊은이가 많아지면서 여론도 바뀌었다.


앞서 5월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가 국민투표를 통해 동성혼을 합법화했다. 1995년까지 이혼이 불법일 만큼 보수적이었던 아일랜드 역시 여론과 인식의 변화를 좇게 된 것이다.


2013년 미국의 퓨(PEW) 리서치센터는 39개국을 대상으로 동성애 인식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인의 39%가 “사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답했다. 독일(87%)·캐나다(80%)·호주(79%)·미국(60%)·일본(54%)보다 낮은 수치다.


한국도 동성애 수용 의견 크게 늘어그러나 2007년 조사(18%)보다 그 수치는 2배 이상 뛰어 인식의 변화 폭은 가장 컸다. 연령에 따른 차이도 컸다. 50세 이상의 16%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답한 데 반해, 18~29세는 71%가 그렇게 답했다.


우리 사회가 시간과 세대에 따라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결과가 일부 현실화된 것이 최근 서울대·고려대의 선거 결과다. 이예원씨는 “동성애자가 선출직에 뽑힌 것은 학생 사회가 성정체성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인정해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대학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변화는 향후 우리 사회의 방향 전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는 “80년대 학생 동아리가 민주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이었던 것처럼 다양한 삶의 양식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선진국에서 동성혼이 인정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인식의 변화였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차이를 주장하며 이슈를 공론화하는 등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수록 법제화가 이뤄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학 성소수자들의 활동은 양적·질적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큐브’의 아스토 회장은 “어릴수록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적어 적극적”이라며 “수시합격자들이 가입을 문의하는 동아리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김도원 인턴기자(경희대 언론정보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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