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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의 원초적 의미인 ‘화답’, 김수영 시에선 ‘사랑’으로 변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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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28면

동서를 막론하고 철학은 사랑의 개념이 다시 태어날 때 시작되었다. 서양철학의 출발점에 있는 플라톤은 에로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던 것을 아름다움과 선(善)을 향한 정신적 충동으로 정의하고, 진리 사랑(필로소피아)의 모태로 삼았다. 유가 전통의 출발점에 있는 공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성적 매력을 의미하던 인(仁)이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뒤바뀌고, 인륜적 질서를 정초하는 최후의 원리로 승격된다. 문제는 공자가 말하는 인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이다.


『논어』(7:32)에는 공자가 다른 사람과 어울려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자는 다른 사람이 노래를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고, 그런 다음에 화답했다(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以後和之).” 나는 공자의 인을 이 장면에 의지해서 해석하고 싶다. 즉 인은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가리킨다. 공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관계는 서로 착한 마음을 자극할 때 성립한다. 인의 원초적 의미는 상호 감응과 화답에 있다. 멋진 노래를 들으면 덩달아 장단을 맞추고 싶은 법. 마찬가지로 좋은 행실로 진실한 반응을 유발하고 선한 마음에 자발적으로 호응하는 것이 공자식 사랑법이다.

천진난만한 응답의 충동 그려낸 ‘눈’김수영식 사랑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그의 시 ‘눈’(1956)은 천진난만한 응답의 충동에서 시심(詩心)을 찾는다.


“눈은 살아있다/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시심은 원초적인 생명으로 돌아가는 데 있고, 원초적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호 응답의 유희로 돌아가는 것임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다른 시 ‘여름밤’(1967)에서 응답의 충동은 사랑이라 불린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 줄/알았다.”


지상의 소음이 천상의 화답을 불러들이는 비밀이 사랑에 있다는 내용이다.


김수영은 부단히 사랑의 주제와 씨름했다. 때로는 유가적 전통의 사랑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보고자 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사례가 ‘사랑의 변주곡’(1967) 마지막 부분이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거다!/복사 씨와 살구 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여기에 나오는 복사 씨와 살구 씨는 원래 주자가 인의 뜻을 풀이할 때 끌어들인 용어였다.


仁에는 사랑 외에도 씨앗이란 뜻 담겨사실 仁이란 한자에는 사랑 이외에도 씨앗이란 뜻이 담겨있다. 한의학에서 불인(不仁)이란 말은 기능장애, 마비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은 원래 생명을 낳고 활력을 불어넣는 힘을 연상시키는 글자다. 주자는 이런 관점에서 인을 자연의 생명과 도덕의 활력을 동시에 정초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새로운 인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복사 씨와 살구 씨를 예로 삼았다. 복사와 살구가 씨앗에서 나온 열매이듯, 세상만물이 인이라는 씨앗에서 나와 다시 그리 돌아가는 열매라는 것이다.


“복사 씨와 살구 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라는 문장은 이런 역사적 문맥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김수영은 유가적 사랑의 개념이 변용되는 역사에 개입하여 당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랑의 개념을 창조코자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정의다.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온몸의 시학이 개진되는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사랑의 개념은 공자의 사랑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논어』에서 인(仁)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보통 둘을 꼽는다. 인을 극기복례(克己復禮)로 풀이하는 대목(12:1)과 충서(忠恕)로 설명하는 대목(4:15)이다. 극기복례는 자기 자신의 특수하고 사적인 욕망을 이겨내어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예로 돌아간다는 것은 보편적 규범을 따라 살아있는 상호 주관적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을 말한다. 종교는 그것이 숭배하는 신에 의해 정의된다(일신교·다신교·범신론 등). 그러나 루터가 간파했던 것처럼 종교의 핵심은 무엇보다 신을 따르는 자의 믿음에 있다. 신이 종교의 객관적 본질이라면, 신앙은 종교의 주관적 본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극기는 사랑의 주관적 본질과 같다. 반면 복례는 사랑의 객관적 본질에 해당한다.


공자의 사랑은 천명과 교신하며 완성충서도 극기복례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언급한다. 충서의 충(忠)은 자기의 내면적 중심을 지킨다는 것이다. 서(恕)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먼저 베푼다는 것이다. 충은 내면으로 돌아가 자신의 기준에 일치하려는 노력이다. 서는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횡단하여 제3의 질서를 여는 노력이다. 충은 내향적 감응(자기자극)이고, 서는 상호적 감응이다. 공자의 사랑은 내향적 복귀(충)를 주관적 본질로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삶의 전망을 가로질러 공통의 도식을 그리는 능력(서)을 객관적 본질로 한다.


『논어』 전체를 마무리하는 문장(20:3)은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로 시작한다. 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인자(仁者)가 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이 문장이 암시하는 것처럼 공자의 사랑은 천명과 교신하는 원격 감응 속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랑은 대충 세 가지 선(線)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하나는 주체의 자기관계로 귀결되는 내향적인 선이다. 다른 하나는 상호 주관적 관계로 나아가는 외향적인 선이다. 마지막은 그 두 가지 선을 하나로 통합하는 추상적인 선이다. 중요한 것은 천명이라는 아득한 구심점을 우회해서 어떤 추상적인 선이 그려질 때라야 사랑의 범위와 구도, 내용과 형식이 비로소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천명은 김수영 시 속의 시대정신『논어』 전체를 여는 세 문장(1:1)은 각각 사랑을 규정하는 세 가지 선에 해당한다.


“배우고 때맞추어 익히면 과연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습이라는 주체의 자기함량운동은 어떤 내향적 회귀의 선에 따라 쾌락을 분비한다.“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온다면 역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거리를 초과하여 감응하는 상호적 관계는 어떤 수평적인 선을 그리며 즐거움을 빚어낸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다면 역시 군자답지 않는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군자가 세속적 인정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랑이 천명이 그리는 선을 따라 처음 시작되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은 이제까지 주로 수직적인 선(충, 극기)이나 수평적인 선(서, 복례)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김수영의 새로운 사랑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은 천명(‘여름밤’의 “천둥”)에서 비롯되는 추상적인 선이다. 천명을 요즘의 말로 옮기자면 시대정신이나 미래의 이념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김수영의 사랑은 시대정신과 교통하는 원격 감응의 선에 의해 때로 고독의 정념이 되고, 때로는 외출의 정념이 된다. 수직의 고독과 수평의 외출은 상호 촉발적인 관계 속에서 맞물린다. 미래의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지는 추상적인 선은 옛 것과 새로운 것을 나누는 원리이자 미지의 모험에 확신을 부여하는 영감이다.


이 점을 형상화하는 작품으로 ‘풀’(1968)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먼 곳에서부터’(1961)도 그에 못지않은 걸작에 속한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 꽃으로부터/ 능금 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을 어림하는 원격 감응의 선을 따라 몸은 고통을 분비하는 어떤 자기함량운동 속에 놓인다. 그것은 남모르게 몸이 성숙해가는 운동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높이에 이르는 운동이다. 따라서 몸은 과거와 다르게 외부와 관계할 수 있게 된다.


『논어』(6:30)에서 공자는 ‘능근취비(能近取譬)’의 방법을 강조했다. 가까운 것을 비유하여 먼 것에 이르자는 것이다. 유교 전통이 먼 것에 대한 감각을 점차 상실하게 된 까닭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사랑이 열린 보편주의로 나아가지 못한 채 충효(忠孝)로 축소되거나 온정주의로 흐르게 된 것은 유교적 근시안의 폐단이다. 그러나 김수영의 새로운 사랑의 개념에 충실하자면 먼 곳으로 가서 가까운 것의 척도를 찾아야 한다. 사랑의 방법은 능근취비가 아니라 능원취비(能遠取譬)가 되어야 한다. 이때 먼 곳은 한계와 같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한계로 나아가는 것, 그 문턱과 같은 한계를 넘어 타인과 공유할 미래로 향하는 것, 그것이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사랑이다.


김상환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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