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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위에 당론, 전란을 부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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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1 면

남한산성(55Χ42㎝):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이불조차 없는 한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총평】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한 서인은 광해군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반정(1623)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냈다. 이괄은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었으나 적절한 대우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이괄의 난, 1624)


인조와 서인 세력은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맞아 싸웠는데,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은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였다.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그 후 후금은 점차 세력을 키워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태종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대의명분에 따라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척화론이 힘을 얻어 청의 요구를 거철하자 청 태종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왕과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여 45일 동안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전쟁이 끝난 후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척화론자와 수만 명의 백성이 청의 수도로 끌려갔다. 이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광해군과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으로 몰락하였다. 동인의 전통은 인조반정 때 서인을 지지하여 살아남은 남인이 잇게 되었고,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더욱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다가 병자호란을 불러오고 말았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인조 때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산림(山林)은 시골은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던 인물들이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라는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하였다.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군영이 더 설치되었다. 인조 때는 어영청(한성 수비), 총융청(북한산성 방어), 수어청(남한산성 방어)이 설치되었다. 정부는 황폐해진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개간을 권장하면서 전국적인 양전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양안에 빠진 토지를 찾아내어 경작지에는 빠짐없이 전세를 부과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정법을 시행하여 풍년과 흉년에 관계 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씩을 내게 하여 전세를 줄여 주었다(1635). 영정법의 시행으로 전세의 비율은 다소 낮아졌지만, 농민의 부담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전세를 낼 때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등이 함께 부과되었는데,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부담을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핵심 키워드】


☞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한 서인은 광해군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반정(1623)]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냈다. 이괄은 인조반정 의 공신이었으나 적절한 대우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이괄의 난, 1624])


인조와 서인 세력은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태종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대의명분에 따라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척화론)]이 대립했다. 청의 요구를 거철하자 청 태종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인조 때는 [어영청(한성 수비)], [총융청(북한산성 방어)], [수어청(남한산성 방어)]이 설치되었다. 정부는 [양전 사업]을 전개했다. 그리고 [영정법]을 시행하여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씩을 내게 하여 전세를 줄여 주었다(1635). 영정법의 시행으로 전세의 비율은 다소 낮아졌지만, 농민의 부담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전세를 낼 때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등이 함께 부과되었는데,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부담을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예상 문제】


1. 다음은 어느 전쟁과 관련된 답사 안내문이다. 이 전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회 정기 답사 안내>

주 제 : 전쟁의 아픔과 북벌일 시 : ○월 ○○일 ○○시답사 장소 : 남한산성 남문 → 수어장대→ 행궁 → 삼전도 비

[답사 유적 안내]

남한산성 :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산성. 사적 57호. 전쟁 당시 왕이 피난와서 항전함수어장대 :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지은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 안쪽의 ‘무망루’ 현판은 삼전도 굴욕과 북벌을 잊지 말자는 뜻
① 명분론에 입각한 외교 정책이 원인이었다.


② 조?명 연합군의 활동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③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④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⑤ 경복궁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2013년 4월 학력평가 4번

?

2. ?다음 대화의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① 향촌 주민들이 조직한 공동 노동 조직이었다.


② 매향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신앙 조직이었다.


③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④ 선현의 덕행을 추모하고 학문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⑤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공동 조직을 재구성한 것이다.

* 2010학년도 수능 13번


3. ?그래프는 조선 시대 어느 정치 세력의 성장 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가) 시기의 이들과 관련된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이용하였다.


②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을 형성하였다.


③ 소격서를 폐지하고 소학 보급에 노력하였다.


④ 위훈 삭제를 시도하여 공신들과 대립하였다.


⑤ 왕은 이들을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 2008학년도 9월 모의평가 5번


4. ?(가)~(라)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가) -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


ㄴ. (나) - 서인과 남인이 예송 논쟁을 벌였다.


ㄷ. (다) - 집권 붕당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ㄹ. (라) - 산림이 부정되고 이조 전랑의 권한이 약화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 ?③ ㄴ, ㄷ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13년 7월 학력평가 11번


5. ?밑줄 친 ‘이 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중략) … 탐관오리들은 거두어들이는 액수가 한정되어 있어 백성을 침탈할 꾀를 부릴 수 없게 되었으니 싫어할 것이고, 그동안 방납을 도맡아 온 자들은 자기 이익을 잃게 되었으니 싫어할 것인데, 이는 모두가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① 환곡제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② 군포 수입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하여 결작을 부과하였다.


③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④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 부담액을 1결당 4두로 고정하였다.


⑤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여 공평한 조세 부담을 꾀하였다.

* 2013학년도 6월 모의평가 5번


6. ?가상 토론회에서 제기된 (가), (나)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가)의 배경은 병자호란이었다.


② (가)는 숙종 때 윤휴의 비판을 받았다.


③ (나)는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④ (나)는 청의 발전된 문물이 전해지면서 확산되었다.


⑤ (가)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나)는 박제가이다.

* 2011학년도 9월 모의평가 13번


7.?(가) ~ (마) 시기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가) -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 되었다.


② (나) - 북인이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였다.


③ (다) - 남인이 중용되고 척신과 환관 세력이 제거되었다.


④ (라) - 서인에게 나누어진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⑤ (마) -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 2012학년도 9월 모의평가 19번


8. ??다음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각 토지 결수의 많고 적음을 확인하고, 1결마다 쌀을 거두어 배에 실어 서울로 보낸다. 바다에서 먼 산간벽지는 쌀 값에 해당하는 삼베나 무명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한다. 궁궐에서 쓰이는 물건, 종묘?사직의 제사 및 사신 접대에 필요한 물품, 말먹이와 땔감까지 모두 이를 통해 해결한다.

[보기]


ㄱ. 시행 과정에서 지주들이 반발하였다.


ㄴ.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ㄷ.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미곡 4두를 거두었다.


ㄹ.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의 칭호를 주고 포 1필을 받았다.


① ㄱ, ㄴ ? ?② ㄱ, ㄷ ? ?③ ㄴ, ㄷ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12학년도 9월 모의평가 8번


9. ?다음 가상의 자료에서 밑줄 친 ‘올해’ 이갑돌의 가족이 부담한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분석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청원서


저는 경기도 시흥에 거주하는 48세의 양인 이갑돌입니다. 44세의 아내와의 사이에 24세의 장남, 20세의 장녀, 18세의 차남, 13세의 삼남 등 3남 1녀를 낳아 모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제 소유의 논 1결을 경작하여 미곡 400두를 수확했으며, 이웃 마을의 양반 최 진사댁의 논 2결을 소작하여 미곡 800두를 수확했는데 타조법으로 소작료를 냈습ㄴ다.


최 진사가 내야 하는 결작까지 제가 대신 내어 매우 억울합니다. 마침 주상께서 수원에 있는 장헌 세자(사도 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오시다가 이곳에 묵는다고 하기에 이를 호소하려고 나왔습니다.


① 갑 : 무명 4필을 군포로 냈을 거야.


② 을 : 미곡 6두를 전세로 냈을 거야.


③ 병 : 미곡 24두를 대동세로 냈을 거야.


④ 정 : 미곡 4두를 최 진사 대신 결작으로 냈을 거야.


⑤ 무 : 미곡 200두를 최 진사에게 소작료로 냈을 거야.

* 2013학년도 9월 모의평가 20번


10. ??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했어요.


②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행되었어요.


③ 어장세와 선박세를 관청에서 징수하게 되었어요.


④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고 전국으로 확대되었어요.


⑤ 공가를 미리 받은 어용 상인이 관청에 물품을 납부했어요.

* 2011학년도 9월 모의평가 16번

?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①
① 임진왜란 이후 명의 국력이 기울고, 북방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후금을 배척했던 외교정책, 즉 친명배금 정책이 원인이 되어 두 차례의 호란이 일어났다.

해설 : 정답 ⑤
⑤ 향약은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질서 유지와 상부상조를 위해 마련된 규약이다.

해설 : 정답 ②
②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이 형성되는 시기는 선조 즉위 이후이다.

해설 : 정답 ④
ㄴ. 예송 논쟁은 현종 때의 일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심화된 사건이다.


ㄹ. 영조는 산림의 존재를 부정하며 이조 전랑이 가지고 있던 관리 선발 관행을 폐지하였다. 천거권 자체는 정조때 폐지되었다.

<오답 풀이>


ㄱ.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된 것은 선조 때의 일이다. (가) 이전 상황이다.


ㄷ. 인조반정 관련 내용이다. (나) 시기의 일이다.

해설 : 정답 ③
③ 대동법의 시행으로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고, 수공업 생산이 늘어나는 등 상품 화폐 경제가 성장하였다.

<오답 풀이>


④ 풍흉에 관계업싱 전세 부담액을 1결당 4두로 고정한 것은 영정법을 의미한다.

해설 : 정답 ②
(가)는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고 전쟁에 대비하자는 북벌론자들의 주장이고, (나)는 청의 이로운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파의 주장이다.


② 송시열과 윤휴는 주자의 학설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입장 차이를 보였지만, 북벌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을 보였다.

<오답 풀이>


① 남한산성의 치욕이라는 문구를 통해 배경이 병자호란임을 알 수 있다. ③ 19세기 개화 사상으로 이어진 사상은 북학론이다. ④ 당시 청은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⑤ (가)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과 윤휴를, (나)의 대표적 인물은 박지원, 박제가를 들 수 있다.

해설 : 정답 ⑤
(가)는 척신 정치 청산 문제와 이조 전랑의 자리를 둘러 싼 사림의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이 분화된 시기이다. (나)는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화된 시기이다. (다)는 광해군 즉위 이후 북인이 집권하여 실리적 중립 외교와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던 시기이다. (라)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이를 견제하면서 북벌과 예송 논쟁을 벌이며 대립하던 시기이다. (마)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고,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일당 전제화가 시작된 시기이다.


⑤ 숙종은 붕당 정치의 전개와 변질을 없애기 위해 왕이 직접 정치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기하였으나, 편당적 인사관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해설 : 정답 ①
자료에서 설명하고 있는 제도는 17세기 광해군 때 실시되었던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되던 토산물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으로 거두는 제도였다.


ㄱ. 대동법의 실시로 인해 세금 부담이 늘어나게 된 지주들이 반발하여 이 법이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는 데 100여 년이 걸렸다.


ㄴ. 대동법 실시 이후 어용 상인인 공인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공가를 미리 받아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납품하였다.

<오답 풀이>


ㄷ.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두를 낸 것은 인조 때 영정법이다.


ㄹ.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의 칭호를 주고 포 1필을 받은 것은 영조 때 실시한 균역법이다.

해설 : 정답 ④
제시문에서 ‘주상께서 수원에 있는 묘를 참배했다’고 했으므로 정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킨 영정법, 공물의 납부를 토지의 면적에 따라 토지 1결당 미곡 12두를 납부하게 하는 대동법, 군포를 1년에 1필 납부하는 균역법,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지주엑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걷어 가는 결작 등이 모두 시행되던 시기이다.


군역의 대상자는 16~60세인 이갑돌, 장남, 차남 이렇게 3명이다. 이갑돌 소유 토지는 1결이다.


④ 결작은 1결당 미곡 2두이고, 최 진사가 내야 하는 결작은 2결이니, 미곡 4두를 최 진사 대신 결작으로 냈을 것이다.

<오답 풀이>


① 균역법은 16~60세의 정남 1인당 군포 1필씩 내는 것이므로 이갑돌 집안은 3필을 군포로 냈을 것이다.


② 영정법은 1결당 4두로, 미곡 6두가 아니라 미곡 4두를 전세로 냈을 것이다.


③ 대동법은 토지 소유자가 1결당 12두를 내는 것이므로, 미곡 24두가 아니라, 12두를 대동세로 냈을 것이다.


⑤ 총 800두를 수확했는데, 타조법(병작반수제)으로 소작료를 냈으므로 미곡 200두가 아닌, 미곡 400두를 최 진사엑 소작료로 냈을 것이다.

해설 : 정답 ③
제시된 자료의 핵심 내용은 방납의 폐단이다. 방납 폐단을 줄이기 위해 시행된 제도는 대동법이다.


③ 어장세와 선박세는 균역법 시행으로 줄어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부과된 세금이었다.


①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해 공인이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면서 수요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공급 역시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② 방납의 폐단이 발생하면서 많은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는 국가 재정의 위기로 이어졌다.


④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으나 전국적 시행까지는 100여 년이 걸렸다. 토지를 소유한 지주 양반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⑤ 공가를 미리 받은 어용 상인을 공인이라 하는데, 이들은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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