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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발칙한 ‘태극 아트’…고정관념 벗어야 살아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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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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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및 사괘를 설치미술로 재탄생시킨 ‘태극놀이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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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나’ 공모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멀티미디어 작품 ‘광복(빛을 되찾다)’의 순간포착 이미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마도 독자 중에 지금 자신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이 프랑스 삼색기로 채색된 분이 있을 것이다. 지난달 13일(현지시간) 파리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한 직후 페이스북은 프로필에 삼색기 색을 겹쳐 쓸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면서 이런 안내문을 띄웠다. “프랑스와 파리 시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프로필 사진을 변경해 주세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가 앞장서서 바꿨고, 세계의 수많은 네티즌이 동참했다.

문화 콘텐트로 활용하는 국기
‘광복70년 미술축전’서 전시
파리 테러 이후 페북 프로필 사진
세계 네티즌, 프랑스 삼색기로 채색

 다른 나라 국기로 제 얼굴을 덧칠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상황. 여느 국기보다 프랑스 삼색기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삼색기의 탄생은 1789년 프랑스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스티유를 습격한 후 프랑스혁명 국민군 총사령관 라파예트가 루이16세를 만나러 가면서 삼색 휘장을 착용했다. 하양은 왕을, 파랑과 빨강은 파리를 상징했다. 삼색은 ‘왕과 국민의 위엄 있고 영원한 동맹의 표시’이자 애국을 뜻했다. 동시에 절대 왕정에 저항한 국민주권을 웅변했고, 자유·평등·박애라는 시민혁명의 철학과 가치를 현현했다.

 이런 이미지가 강하기에 파리 테러 국면에서 삼색기는 프랑스 국기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상징할 수 있었다. 여기엔 우리가 보고 자란 여러 예술작품 영향도 있다. 예컨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1830)를 보자. 한 여성이 삼색기를 들고 혁명군을 이끌고 있다. 이때 삼색기는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는 민중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렇듯 근대 프랑스 미술에서 삼색기는 자유를 향한 열망과 함께 민주주의의 처절한 진보 과정을 담아냈다.

 ‘문화 콘텐트’로서의 국기 활용이 가장 활발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합중국을 구성하는 주의 개수를 의미하는 50개의 별은 성조기를 특징짓는다. 성조기 의류·학용품·인테리어 소품 등 종류가 수천, 수만 가지다. 외국인·여행자들이 선호하 는 ‘관광 효자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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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미국 전위주의 작가 재스퍼 존스의 ‘세 개의 성조기(Three flags·1958)’와 영국 유니언잭을 해체한 길버트 프로에시 & 조지 패스모어의 ‘프리기다리움(Frigidarium·2008)’. 이노디자인의 T라인 상품들인 접시·캔들·스카프. [중앙포토·이노디자인]

 전 세계에 성조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주요한 매체가 할리우드 영화다. ‘인터스텔라’ 같은 SF 영화를 비롯해 각종 전쟁·스포츠 영화에서 성조기는 도전·진취·정의로 각인된다. 1950~80년대까지 미국 역사를 돌아보는 ‘포레스트 검프’(1994)에선 반전 연설을 하는 대학생들마저 성조기 티셔츠를 입고 있다. 성조기는 애국심을 넘어서 이상(理想)과 동일시된다.

 영국 유니언잭 역시 애국심과 관계없이 미학적·조형적 측면에서 활발하게 변용되는 국기다. 현대미술에서 영국은 국기의 활용에 대해 관대하고 표현이 자유롭다. 예컨대 길버트 프로에시와 조지 패스모어는 ‘프리기다리움(Frigidarium)’(2008) 같은 작품에서 유니언잭을 패턴으로 활용한 ‘살아 있는 조각’을 실험한다. 여기에서 영국 국기는 십자가로 상징되는 기독교에 대한 물음을 내포하는 등 전위적 장치로 기능한다.

 반면 한국 태극기를 생각하면 척 하고 떠오르는 미술작품이 없다. 오직 사각 액자 안에 갇힌 태극기, 혹은 국기 게양대 위의 깃발만이 직접적으로 연상된다. 영화 속 이미지도 비슷하다. 올해 1270만 관객을 끌어들인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속사포(조진웅)·황덕삼(최덕문)은 거사를 위해 떠나기 전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결의를 다진다. 영화 포스터로도 활용된 이 장면에서 태극기는 독립조국에 대한 열망을 은유한다.

 지난해 1400만 관객몰이를 한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도 ‘태극기=국가·정부’를 재확인시킨다. 거리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영자(김윤진)와 덕수(황정민)는 국기하강식 사이렌이 울리자 잠시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이렇듯 현대사 속 태극기는 국기게양대에서, 교실 정중앙 벽에서, 극장영화 상영 전이나 안방 TV방송 종료를 알리는 애국가 화면에서 권위의 대상으로 군림해 왔다.

 이 때문에 한국 화단에서 ‘태극 아트’가 자유롭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울대 미학과 김병종 교수는 “태극기는 남한의 국가 상징 브랜드로 기능해 온 데다 디자인 활용에 있어서도 접근이 어려운 원칙주의가 강했다”고 말했다. 2002년 일부 개정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7770호)의 2조는 ‘국기는 제작·보존·사용 및 판매에 있어서 그 존엄성이 유지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조형적 면에서도 국가 중심주의로 독해될 여지가 있다. 동양철학을 연구한 박낙규 교수(전 서울대 미학과)는 “태극기는 시각적으로 청홍·음양·수리적 측면이 기호화한 것인데, 대한제국이 국기로 채택할 당시 나라를 중심에 두려 한 의지가 형태적으로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태극무늬가 정중앙에 위치하고 사괘가 이를 둘러싼 형태가 중앙집중적인 미학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대구교육대 송춘영 명예교수는 태극기의 각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성을 나타낸다. 가운데 태극문양은 음(陰·파랑)과 양(陽·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만물의 음양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진리를 형상화한다. 네 모서리의 사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은 주역을 익힐 일도 없거니와 태극기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할 예술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태극기로 탱크톱을 해 입은 여성들 정도가 이 같은 원칙주의를 깨부수었다. 이후로 상업 디자인은 상대적으로 활성화됐다. 이노디자인(대표 김영세)은 태극무늬와 사괘 등을 활용한 상품들을 ‘T라인’이라는 브랜드로 밀고 있다. 머그컵·만년필·소파·여행가방 등이 세련된 도형미를 자랑한다.

 18일 개막해 오는 30일까지 이어지는 ‘광복 70년 대한민국미술축전’ 전시(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알림터 알림1관)는 ‘태극 아트’의 한계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태극기와 나’라는 주제로 출품된 일반인 공모작 중에서 입선작품 87점(작가 수 80명)의 절대다수가 평면회화작품(62점)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 면면에서 태극기는 그림 속 인물이 들고 있는 형태이거나 북한 선전화를 연상시키는 ‘포스터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대통령상을 수상한 ‘광복(빛을 되찾다)’은 ‘태극기 없는 태극 아트’를 인상적으로 실현했다. 3m가 넘는 입체조형물에 다양한 빛을 비출 때마다 태극과 사괘가 춤을 춘다. 공동작업을 한 작가 3명 김준수(25)·김성필(24)·천진우(24)는 90년대 이후 출생한 미대생들. 국기하강식도, 반공포스터 그리기도 없던 시대에 나고 성장한 이들에 와서야 비로소 ‘자유롭고 발칙한 태극 아트’ 가능성이 보인다.

 선승혜 광복 70년 대한민국미술축전 총감독은 이번 기획과 관련해 “태극기를 고정적으로 사고하는 데서 벗어나 해체하고 갖고 노는 축제를 벌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전시관 한가운데는 태극과 건곤감리 사괘를 입체조형물로 구현한 놀이터가 설치돼 있다. 이것을 만지고 술래잡기 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자라나면 또 다른 ‘태극 아트’가 가능할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조국 해방이 아니라 ‘상상의 해방’이요, ‘태극기의 자유’다.

글=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십자가형·삼색형·천체형 국기 많아 … 별은 불변·통합 상징

각국의 국기는 크게 나눠 세 가지 유형, 즉 십자가형·삼색형·천체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십자가형은 주로 유럽 국가가 많으며 기독교 가치를 상징한다. 이 중 덴마크 국기는 1219년부터 사용돼 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기다. 당시 발데마르 빅토리우스 왕이 에스토니아 원정 전투를 벌일 때 하늘에서 빨강 바탕에 하얀 십자가 모양의 깃발이 내려와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북유럽 국가들인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도 십자가형이다. 스위스의 정십자형 국기는 색깔만 반전시키면 ‘적십자’ 로고가 된다.

 삼색기는 가로형과 세로형이 있다. 가로는 러시아·독일·헝가리 등이고 세로는 이탈리아·벨기에·아일랜드·루마니아 등이다. 아프리카의 말리·차드·코트디부아르도 해당된다. 삼색기를 쓰는 국가들은 색마다 서로 다른 상징과 정신 가치를 부여한다. 주로 사용되는 색은 빨강·파랑·노랑·초록·하양·검정의 6색이다. 이 중 빨강은 사랑과 피를 상징하는 공통점이 있다.

 해·별·달과 같은 천체의 상징을 넣는 국기도 많은데 지역에 관계없이 별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위치가 변하는 해나 달보다 불변의 지향점으로서 가치를 상징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슬람권 국기에서 흔한 초승달과 별은 무함마드가 최초의 계시를 받았을 때 하늘에 초승달과 별이 떠 있던 데서 유래했다. 별은 또 통합가치를 뜻하기도 한다. 수십 개 주로 이뤄진 미국과 브라질이 대표적이다. 중국 오성기는 5개의 별로 계급 통합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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