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기조에… 한은 '인플레 파이터'에서 '디플레 파이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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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안정’은 한국은행의 최고 가치였다. 그간 물가 안정은 지나친 물가 상승을 방지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한은 홈페이지에 실린 ‘설립 목적’에도 이런 의지가 담겼다. “물가안정은 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며 돈의 가치는 물가 수준에 좌우됩니다. 물가가 오르면 같은 금액을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앞으로 한은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의 물가 안정을 추구한다. ‘저물가 기조 탈피’를 사실상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치는 2.0%로 잡았다. 한은이 물가목표제를 도입한 1998년 이후 가장 낮다. 하지만 올해 물가상승률(정부 0.7% 추산)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내년에도 2%대 물가 달성은 어렵다. 정부는 내년 물가상승률을 1.5%로 전망했다. 한은은 지난 10월 ‘수정경제전망’에서 내년에 물가가 1.7% 상승한다고 예상했다.

이에 한은은 한국 경제가 적정한 수준의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물가 상승률을 2%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봤다. 서영경 한은 부총재보는 “한국 경제의 후생을 극대화하는 적정 인플레이션을 계산한 결과 2%가 적정한 수준”이라며 “저물가 기조를 탈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은의 이런 조치는 물가의 부작용을 걱정해야 하는 저성장 시대에 맞춰 통화정책의 방향을 튼 것으로 풀이된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 경제는 이미 저성장에 진입했다”며 “물가상승률이 3%대 이상을 기록한 과거와 달리 이제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제로(0)’ 물가 수준인 미국이 2%를 물가상승률 목표치로 삼고 물가를 끌어올리려 노력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도 16일 발표한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저물가 기조 탈피를 강조하며 향후 경상성장률 5%대(실질 성장률 3%대 +소비자물가 상승률 2%대)를 유지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한은이 저물가 탈피에 나서야 할 만큼 향후 경제상황은 고물가를 걱정한 과거보다 악화됐다. 내수는 다소 살아났지만 수출은 여전히 부진하며 올해 경제성장률은 결국 2%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올해 3%대 성장이 가능하다고 고집했던 정부는 이날 올해 성장률이 2.7%라고 밝혔다.

향후 경제전망도 흐리다. 특히 투자부진, 생산성 정체와 같은 구조적 취약성에 고령화와 같은 요인까지 겹치며 잠재성장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한은은 3%대 중후반을 기록하던 잠재성장률이 2015~2018년에는 3.0~3.2% 수준에 머물 걸로 추산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6년부터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가 부진하면 수요가 줄어 물가는 떨어지게 된다. 실제 정부가 발표한 올해 물가상승률은 0.7%다. 유가 하락과 함께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이 영향을 미쳤다.

한은은 저물가가 지속되면 한국 경제의 활력을 훼손한다고 분석했다. 서 부총재보는 “1%대 물가는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려 성장을 제약하는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현재처럼 목표치에 범위를 정하지 않고 2%로 한정한 것도 같은 이유다. 1%대 물가 유지가 바람직하다는 오해를 막기 위함이다.

전문가는 이런 한은과 정부의 방침이 내수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물가 관리는 통화정책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라며 “경기가 살아나면 물가도 자연히 오르는 만큼 내수 등 경기를 개선하겠다는 당국의 방침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한은의 방침이 경상성장률을 중시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맞물려 기준금리 인하 압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물가 2%대를 지키기 위해 금리 인하를 시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구조개혁 등을 통해 성장잠재력이 오르면 물가도 자연히 상승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0%대 물가라고는 하지만 체감물가와는 괴리가 있는 상황에서 한은의 저금리 탈피 노력이 오히려 서민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이찬우 기획재정부 경제통계국장은 “정부 입장에선 수요가 늘어 물가가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면서도 “생활 물가를 등한시하겠다는 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남현·김경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한국 물가안정목표>

*자료 : 한국은행


기간


목표(%)


대상지표


1998년

9.0±1

소비자물가지수

1999년

3.0±1

소비자물가지수

2000년

2.5±1

근원 인플레이션

2001년

3.0±1

근원 인플레이션

2002년

3.0±1

근원 인플레이션

2003년

3.0±1

근원 인플레이션

2004~2006년

2.5~3.5

근원 인플레이션

2007~2009년

3.0±0.5

소비자물가지수

2010~2012년

3.0±1

소비자물가지수

2013~2015년

2.5~3.5

소비자물가지수

2016~2018년

2.0

소비자물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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