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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홍색공급망’, 우리에게 축복인가 재앙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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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한우덕 기자 중앙일보 차이나랩 고문/상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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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해보나 마나 한 게임’이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만 총통선거가 그렇다. 각종 여론 조사는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의 낙승을 예상한다. 승패는 ‘중국’에서 갈렸다. 4년 전 선거에서 대만 유권자들은 ‘중국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국민당 후보(마잉주(馬英九) 현 총통)의 손을 들어줬다. 선거를 위해 대륙에서 귀국하는 유권자가 줄을 이었다. 당시 경쟁자였던 차이잉원 후보는 ‘차이완(Chiwan·중국과 대만의 경제 협력)’ 열풍에 눌려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런 대만이 4년 만에 다시 차이 후보를 선택하려는 이유가 뭘까. 이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바로 중국의 ‘홍색공급망(紅色供給網·Red Supply Chain)’이다.

자기 완결 구조로 주변국 위협하는 중국 산업
흡수 안 되려면 기술력으로 공생할 맷집 키워야

 홍색공급망의 핵심은 ‘중국이 혼자 다 한다’는 것이다. 과거 중국 제조 공정은 해외에서 수입한 부품을 조립해 수출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부품도 국내에서 조달한다. 제조 공정의 자기 완결이다. 대만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수출의 약 40%가 중국으로 가고, 그중 부품이 80%에 달하니 말이다. 게다가 기계·석유화학 등 경쟁 분야 중소기업은 대부분 홍색공급망에 휩쓸려 중국으로 갔다. 그마나 남아 있는 분야가 정보기술(IT) 산업, 그중에서도 반도체다. 그러나 중국 ‘반도체 공정’의 주력인 칭화유니그룹이 최근 대만 반도체 업체인 파워텍 인수를 선언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마저 붉은색으로 물들 것’이라는 우려다.

 업계는 ‘그래도 중국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만의 대표적인 반도체 메이커인 TSMC도 난징(南京)에 첨단 반도체 조립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그러나 일반 유권자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뭐냐’고 묻는다. 공장이 가면 수출이 줄어 성장이 둔화되고 일자리가 줄어든다. 지난 3분기 대만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1%였다. ‘차이완 딜레마’, 박한진 KOTRA 타이베이 무역관장의 대만 경제 진단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중국의 홍색공급망은 정도의 차이일 뿐 같은 메커니즘으로 우리에게 위협적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 역시 ‘혼자 다 한다’식의 중국의 공업 구조에 막혀 팔아먹을 게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올 들어 10개월간 대중국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4.3% 감소했다. 가전에 이어 철강·조선이 중국에 잡혔고, 이제는 IT와 석유화학이 공세에 직면하고 있다.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대만이 더 먼저, 더 심각하게 홍색공급망에 휩쓸리고 있을 뿐이다.

 대만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다. 길은 있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이를 보여준다.

 삼성·LG 등 국내 업체들은 중국 디스플레이 시장의 절대 강자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 동안은 앞면이 불룩한 브라운관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는 평면LCD(액정표시장치)로 시장을 주도했다. 지금도 우리는 중국 LCD 수입시장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이 TV·컴퓨터·스마트폰 등을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우리도 이익을 얻는 구조다. 홍색공급망과의 공존이다.

 최근 중국 LCD기업의 공세가 거세다. 기술은 거의 따라잡았고, 생산량도 내년 한국을 추월할 전망이다. 국내에서 LCD 위기론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국내 업체의 시선은 LCD보다 얇고 선명하면서도 반응 속도가 1000배 이상 빠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분야로 향한다. 이 분야에서 다시 중국과 기술 격차를 벌려놓고 있다. 브라운관에서 LCD로 넘어갈 때 그랬듯 우리는 한발 앞서 OLED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홍색공급망에 뛰어들어 이익을 얻으면서도 그에 빨려들지 않는 맷집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홍색공급망은 점점 더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의 사례는 우리 대응에 따라 축복의 존재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앙이냐 축복이냐의 갈림은 역시 기술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우리 기업은 과연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지, 정부는 이를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경제 역시 가까운 장래에 ‘홍색공급망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 있다. 대만 총통 선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