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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할머니 수녀' 이해인

중앙일보

입력

이해인수녀의 '12월의 시'로 마음을 다잡으며 12월을 시작했다.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지난주 뜬금없는 소식이 SNS에 올랐다.
이해인수녀가 위독하다는 알림이었다.
철렁했다.
다행히도 오보였다.

가슴을 쓸어내리자마자 ‘이해인’이란 이름이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분명 오보라고 했건만 웬일인가 했다.
공교롭게도 동명이인 탤런트의 그저 그런 뉴스였다.

야릇하게도 그 오보와 해프닝 덕에 이해인 수녀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2012년 6월 22일 [이해인수녀, 혜민스님] 폴더다.

오래전부터 기자 노릇하며 꼭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이해인수녀를 손꼽았었다.
뵙고자 청을 넣어도 도통 만날 수 없었다.
건강이 여의치 않다는 답만 들을 수 있었다.

혜민스님과 대담이 성사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장소는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었다.
오매불망하던 일이니 어디건 열일 제쳐 두고 가야할 형편이었다.

첫 모습, 그동안 사진으로만 봐왔던 이해인 수녀의 모습과 달랐다.
때론 사진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게 마련이다.
만나지 못한 터니 그녀의 시와 오버랩된 사진으로 지레 판단했었다.

사진 속 이해인수녀는 언제나 고매했다.
그 사진들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랐다.
그 모습으로만 각인되어있었다.

혜민스님이 택시로 도착했을 때부터 눈을 의심했다.
잰걸음으로 달려 나가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마치 달음질하듯 했다.
그 뒷모습, 아이 같았다.

여지없이 드러난 하얀 이빨,
눈동자를 가릴 만큼 깊이 팬 주름의 웃음,
손자를 반겨주던 울 할머니 같았다.

대담을 하며 농담처럼 말했다.
“일주일 전쯤 갑자기 어지러워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오늘 스님도 못 보고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구나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고혈압약을 꼭 챙겨 먹으라고 했는데 방심했다가 그만….”

놀라며 혜민스님이 암 투병의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물었다.

“처음 병을 알고 나서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어요. 솔직히 두렵기도 했어요.
고통을 참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죽음이 친근해졌어요. 지금은 굉장히 평온해요.”

순간 이해인수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사진으론 보이지 않을 정도이지만 빛에 비친 눈 아래, 뭔가 반짝이며 영롱했다.
혜민스님도 눈을 훔쳤다.
그 영롱한 물기를 본 게다.

“이왕 온 암, 미워하기보다 같이 잘살아 보자며 다독였어요. 그런 마음으로 하루 또 하루 살다 보니 4년을 견딘 거예요.”

넌지시 웃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인터뷰 내내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입술에 물었다.
지나온 하루하루를 깨무는 듯했다.

“그러다 그냥 아프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내 아픔이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와 정화가 되길 기도했어요.
내 아픔을 통해 아픈 사람과 벗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잖아요.
고통이 진주일 수 있다는 것을 아파 보니 알겠네요.”

‘고통이 진주일 수 있다’는 말에 조금 전 보았던 눈가의 영롱한 물기가 겹쳐졌다.

인터뷰를 마친 후, 혼자 남았다.
청을 드렸다.
초상화를 한 장 찍고 싶다고 했다.

조건을 달았다.
예쁘게 찍지 말고 수더분한 할머니로 찍어 달라는 조건이었다.
아픔을 겪고, 이겨내며 지금에 이른 당신의 모습이 더도 덜도 없는 ‘이해인’이란 의미였다.

촬영 후 바깥 산책을 했다.
유치원생들이 삼삼오오 놀고 있었다.
금세 꼬맹이들과 어울렸다.
나무 막대기 하나로 한 꼬맹이와 줄다리기를 했다.
그러자 애들이 하나 둘 달라붙었다.
어느새 한 무리가 되었다.
영락없는 이웃집 할머니였다.

12월,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의 시’ 끝 부분을 다시 되뇐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 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권혁재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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