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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견딘 고서의 기품 … 시대의 정신향기 만나는 기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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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26면

2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이 된 주샹쥐에서는 책을 담론하는 프로그램이 열린다.

1 타이완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황쥔비가 쓴 현판.

고서점 주샹쥐(舊香居)는 타이완사범대학 인근의 소란스런 야시장이 끝나는 그곳에 있다. 서예가이자 화가인 황쥔비(黃君璧)가 쓴 현판이 서점 입구 문 위에 걸려 있다. 대가의 글씨가 서점의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게 한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온 고서들이 뿜어내는 기품 같은 걸 느낀다.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써냈지만 나는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책들의 거처 주샹쥐에서 새삼 실감한다. 새것보다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주샹쥐는 책과 함께 서찰·서예·그림·엽서·사진·지도 등 종이로 된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수집해놓는다. 종이로 된 것들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세월을 이겨내는 미인은 없다지만 책을 비롯해 종이로 표현되는 인간 정신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 향은 깊어진다. 주샹쥐는 이름 그대로 오래된 책과 종이의 숙성된 정신, 그 향과 가치에 취하는 애서가들의 놀이터다.

파리에서 4년간 유학하면서 예술경영을 공부한 우야후이. 주샹쥐에서는 늘 작은 와인 파티가 열린다. 그는 근세기 파리에서 번성한 살롱의 마담 같은 역할을 한다.

한 해의 끝날엔 책 교환 파티 열어젊고 아름다운 여성 우야후이(吳雅慧)가 주샹쥐를 이끌고 있다. 파리에서 4년 유학하면서 예술경영을 공부했다. 유학 시절 실비아 휘트먼이 이끄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드나들면서 그 책과 문예의 세계를 경험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 우후이캉(吳輝康)의 서점에서 책과 놀면서 책의 세계를 배웠다. 그러고 보니 우야후이는 30여 년째 책 속에서 책과 놀고 있다. 아버지는 오래된 책과 물건을 수집하던 할아버지 우진장(吳金章)의 뒤를 이어 1972년에 서점을 열었다. 아버지는 오래된 책과 물건들의 세계와 가치를 현장체험으로 학습했다. 산둥(山東) 출신인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1949년 장제스(蔣介石) 부대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왔다.


나는 지난 11월 타이베이에서 열린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20차 회의를 끝내고 롄징(聯經)출판사의 린짜이줴(林載爵) 대표와 함께 주샹쥐를 찾았다. 우야후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책과 함께 노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였다. 갖고 있는 이런 책 저런 물건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의 신명나는 책이야기는 좀체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책과 함께 삶을 사는 서점주 우야후이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이내 친구가 된다. 주샹쥐를 찾는 고객들과 우야후이는 책을 이야기하다가는 결국 작은 와인파티로 진전하고 심야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마당을 펼치곤 한다. 책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우야후이는 근세기 파리에서 번성한 살롱의 마담 같은 역할을 해내는 셈이다.


우야후이는 1년에 한 번은 별난 파티를 마련한다. ‘환서(換書)파티’다. 매년 12월 31일 30~40명이 모여 자기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의 책과 바꾸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송년모임이다. 참가자들은 자기가 읽은 책의 감상을 작성해와서 책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다. 선물받은 사람이 그것을 읽는다. 친구가 되고 친목이 돈독해지면서 한 해를 보내는 밤은 깊어간다.

고서점 주샹쥐는 대륙뿐 아니라 일본, 홍콩의 애서가·장서가들이 찾는 명문 서점이다.

주소 臺北市大安區龍泉街81호 전화 +886 2 2368 0576 페이스북 www.facebook.com/jxjbooks 이메일 jxjbooks@seed.net.tw

대만 현대사 만든 인사들의 서찰도 보유타이베이의 룽취안제(龍泉街) 81호에 주소를 둔 주샹쥐는 사실은 작은 서점이다. 1층이 50여 평, 지하가 30여 평이다. 그러나 주샹쥐가 갖고 있는 책들과 콘텐트는 넓고도 깊다. 절판된 문·사·철 고서들과 서예작품·지도·육필원고들의 수준이 놀랍다. 위유런(于右任)의 서예작품이 걸려 있다. 작가이자 서예가인 타이징눙(台靜農)의 작품도 있다. 20세기 중국문학사를 빛낸 문학가들의 초판본이 서가에 앉아 있다. 쉬즈모(徐志摩)의 시집, 선충원(沈從文)의 소설 『새것과 헌것』 『노실인(老實人)』, 왕시옌(王西彦)의 소설 『촌야연인(村野戀人)』, 라오서(老舍)의 소설 『화장(火葬)』과 『묘성기(?城記)』, 루쉰(魯迅)의 소설 『방황』과 『분(墳)』, 마오둔(茅盾)의 소설 『동요(動搖)』, 장아이링(張愛玲)의 소설 『앙가(秧歌)』와 『유언(流言)』, 쉬친원(許欽文)의 『고향』, 궈모뤄(郭沫若)의 『함성』이 다른 책과 어깨동무하고 있다.


주샹쥐는 위유런의 서찰 500여 점과 사진작가 랑징산(郞靜山)의 사진 200여 점을 갖고 있다. 지난 90년대엔 한 집안에서 대만의 현대사를 만든 지식인·학자·작가·예술가·정치가들의 서찰 200여 통을 사들였다. 국민당 원로 장췬(張群), 가톨릭 주교로 푸런대(輔仁大) 총장이었던 위빈(于斌), 잡지인 레이전(雷震), 서예가 우징환(吳敬桓), 고궁박물원 원장 친라오이(秦孝依), 5·4운동을 명명한 학자 뤄자룬(羅家倫), 산문가 량스추(梁實秋), 역사학자 선윈룽(沈雲龍), 작가 녜화링(?華?)·린하이인(林海音)·바이셴융(白先勇) 등이 남긴 육필은 시대를 증거하는 정신의 정화(精華)가 아닌가. 이 육필들은 2011년 ‘대만 100년의 명인서찰전’이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됐다.


주샹쥐가 잇따라 기획하는 특별전은 중국 근현대사의 문화사를 읽게 한다. ‘문학청춘: 대만 구서(舊書) 풍경전’ ‘삐라와 금서’ ‘타이베이 문청생활고(文靑生活考)’, ‘장다쳰(張大千)의 서책과 문헌전’ ‘5·4운동의 빛과 그림자’ ‘청대 대만 문헌자료전’ ‘1930년대 신문학의 정수: 중국신문학진본전’이 그 특별기획전들이다.


30만 권의 구서·희서를 갖고 있는 주샹쥐는 스스로 기획하는 특별전 말고도 다른 박물관이나 연구기관들과 연대하는 전시회에 참여한다. 홍콩과 대륙의 초청을 받기도 한다. 올해엔 광저우에서 초청받았다. 대륙에서 열리는 책 경매시장에도 진출하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서 학자·전문가들 찾아와주샹쥐는 책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를 담론하는 사랑방이다. 특별기획전을 심층으로 논의하는 강연회가 열린다. 문제작을 펴낸 지식인·작가들의 신간출시 행사도 한다. 리즈밍(李志銘)이 펴낸 『구서(舊書)방랑』과 『독서방랑』을 위한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작가 바이셴융과 푸리(符立)의 대담이 기획된다. 고서문화의 밤도 열린다. ‘밤책방’을 열어 탐서(探書)와 장서(藏書)의 즐거움을 주고받는다. 서점주 우야후이가 담론을 주재하기도 한다. ‘책방야화’로 주샹쥐의 등불은 꺼질 줄 모른다.


작은 서점 주샹쥐. 그러나 동아시아의 광대한 유역에서 작가·지식인·학자들이 찾는다. 대만의 중앙연구원 부원장 왕판썬(王汎森)과 원사(院士) 리어우판(李歐梵), 호적기념관 관장 판광저(潘光哲), 시인 양쩌(楊澤)와 유위(憂宇), 사진작가 천촨싱(陳傳興)과 궈잉성(郭英聲), 화가 훠강(?剛)이 출입한다. 홍콩의 영화감독 왕자웨이(王家衛)와 작사가 린시(林夕), 문학연구가 루웨이란(盧瑋?), 언론인 룽징창(龍景昌)이 단골 고객이다. 대륙의 고서전문가 선진(沈津)과 장서가 웨이리(韋力), 중국현대문학 연구가 천쯔산(陳子善), 저술가 후훙샤(胡洪俠)가 찾아온다. 일본의 문학가들이 찾는다. 네덜란드의 중국사 연구가도 찾는다.


“우리 서점을 방문하는 인사들은 진성 고객입니다. 하루에 50~60명이 방문하지만, 이들은 주샹쥐의 콘텐트를 알고 있습니다. 수천만 원의 고서도 구입해갑니다. 책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지요. 특별기획전에 출품된 책들을 몽땅 구입해가는 고객도 있답니다.”


‘파지에 보물이 있다’ 간파한 서점책 구경하러 들렀다가 여러 권씩 사가는 경우도 있다. 이야기 주고받다간 주머니를 아낌없이 비운다. 진정한 수집가라면 희귀본이 나타날 땐 그걸 놓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되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구입하기도 합니다. 나도 책 수집가니까요. 내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만나는 것이야말로 애서가들에겐 양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지 않았나. 진정한 수집가가 오래된 한 권의 책을 손에 쥔다는 것은 그 책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독일 튀빙겐의 200여 년 된 고서점 헤켄하우스에서 1895년부터 3년 동안 도제 생활을 한 헤르만 헤세도 “반듯한 독자란 책을 가슴으로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서가·애서가·애독자의 책에 대한 자세와 마음은 동과 서라고 해서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화가 번창하는 도시나 시대에는 반드시 출판문화와 서점들이 꽃을 피운다. 청나라 건륭(乾隆) 24년(1759), 화가 서양(徐揚)이 강남의 쑤저우(蘇州) 풍경을 그린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에는 번성하는 쑤저우의 250년 전 풍경이 고스란히 묘사돼 있다. 2층 건물인 대아당서방(大雅堂書坊) 간판이 보이고 고금서적(古今書籍)과 서방(書坊)의 깃발도 보인다. 베이징의 류리창(琉璃廠) 서점들도 건륭·가경(嘉慶)시대부터 형성됐다. 민국시대의 지도를 보면 상하이의 푸저우루(福州路)에도 서점이 즐비하다. 지금 타이완사범대학과 인근엔 40여 개의 새책방·헌책방이 책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주샹쥐도 이런 중국서점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유산의 한 풍경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종이의 존귀함을 잊고 산다. 책도 함부로 내버린다. 무게로 달아 사고판다. 귀중한 책이 파지가 된다. 우후이캉은 이 파지 속에 보물이 있다는 걸 간파해냈다. 대부분의 중국 고서상들이 파지수집상에게 무게로 달아 헌책을 구입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책을 무게가 아닌 권수대로 계산을 치르고 사들였다. 파지수집상이 그에게로 몰려든 건 당연하다.


명말 장쑤(江蘇) 창수(常熟)의 장서가 모자진(毛子晉)이 대문에 방을 써붙였다.


“송(宋)의 목판본을 가지고 오면 이 집 주인은 책의 쪽수를 계산하여 한 쪽에 200씩 주고 사겠다. 옛 필사본은 한 쪽에 40을 주겠다. 희귀본을 갖고 오면 다른 집이 1000을 줄 때 이 집 주인은 1200을 주겠다.”


모자진의 대문 앞에는 책을 싣고 오는 수레가 줄을 이었다. “어떤 장사든 모씨 집안에 책을 공급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300년 후 타이베이의 주샹쥐가 모씨 집안의 도서관 급고각(汲古閣)의 방법을 따른 셈이 아닌가.


20세기 중국은 인류가 일찍이 겪지 못한 역사와 사상을 체험했다. 주샹쥐의 책들은 격동하는 역사와 사상의 현장에서 창출된 것이다. 주샹쥐에 가면 역사와 시대를 통찰한 선구자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오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책들의 갈피갈피에 새겨져 있는 시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책들의 향, 세상을 보듬는 따뜻한 울림과 함께.


김언호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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