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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⑦ "돈 이제 그만 벌어도 안 되냐? 외국 한 번 가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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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분열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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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누구보다 정치적으로 활동했지만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뒀습니다.  그러던 그가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몸을 던졌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작성했던 1987년 ‘단일화 촉구문’에 남아있습니다.

양 김씨가 동치 출마해 군부독재에게 승리가 돌아갈 경우, 민주화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가 사회에 미만되고 많은 국민들이 걷잡을 수 없는 좌절감과 패배감에 젖어들어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을 상실하고 마는 참으로 무서운 사태가 초래될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단일화 촉구 선언문)

조영래는 '단일화국민협의회'를 이끌며 양김과 접촉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선거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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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우(변호사)

노태우가 당선돼 엄청나게 실망을 했죠.  그때 조금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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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 전 시민공익법률상담소장)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아 속상해했어요. 조 변호사는 직선제 개헌이 되면 대권후보들이 각개약진하는 상황이 올 거라는 걱정을 6월 항쟁 이전부터 했습니다. 몇 군데 조짐이 있었죠.

당시 조변호사가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단식도 해지만 결국 정권교체에 실패했지요. 그러고 나서는 여러 가지로 의욕을 많이 잃은 셈이지요.  그리고 88년·89년도는 그래서 별로 그렇게 열심히 일을 안 하셨어요. 조 변호사가 너무나 속상해했지만 그런 걸 밖으로 발산하는 형이 아니거든요.  마음속에 다 넣어두고 삭이는 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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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조갑제 닷컴 대표)

87년 12월 16일이 아마 대선일인데 그날 인도로 갔어요. 결과를 알고 갔는지 모르겠는데, 한 열흘 동안 인도 다녀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간디보다 박정희가 더 나은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그때쯤이면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쪽으로 이제 기울고 있을 때인데, 조 변호사가 그러는 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그래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거기에 코멘트 한다든지 하지는 않았어요.

박정희의 인간됨에 대해서도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마음이나 이런 건 별로 없더라고요. 아주 냉정하게 보더라고.

또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나요. 그때 비행기가 좀 흔들렸는지…

"비행기가 착륙할 때 빙빙 돌았는데 마흔 살았으면 많이 살았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불안하지 않더라."

저는 얘길 듣고 '…아니 80~90까지 살아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일찍 죽고 나서 그 얘기가 생각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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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서울시장)

언제 보니까 그 단일화 선언문이 저한테 있더라고요. 제가 참여연대할 때 그거를 우리 미술전람회에 내놨더니 누가 500만원에 사갔어요.  조영래 변호사님의 양김의 단일화 촉구문 말이에요. 원본은 그분한테 가 있죠. 내가 팔아먹었으니까, 나는 돈이 필요해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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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당시 중앙일보 칼럼 필진으로 활동했던 故 조영래 변호사.


◆ 전환의 모색… "외국 한 번 가봐라"

87년 대선 패배 이후, 침잠했던 조영래는 서서히 전환을 모색해 갔습니다. 90년 1~5월 미국 컬럼비아대학 인권문제 연구소의 초청으로 국제세미나와 '인권변론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도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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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표(직업운동가 · 현 뉴스바로 대표)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조영래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양김이 끝나면 내가 나서겠다, 이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조영래 정도 되면.

그런데 조영래는 그걸 안 한 거야.

사람들은 다 조영래가 나서야 된다고 보는데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겁니다.

제가 88년 12월에 출소해서, 제가 "민중당을 같이 하자"하니까 조영래가 "장 형도 그렇게나 시달리는데, 아이고 난 자신 없다"그러는 거예요. 안 하고 미국에 갔죠. 조영래가 그렇게나 탁월한데도 새로운 전략을 주장하지 않았어요. 이런 전략(민중당 창당)에 조영래가 굉장히 긴가민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다 조영래가 대통령이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조영래 혼자만 그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왜? 겸손하니까. 나는 그래서 그런 점은 굉장한 한계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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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수(법무법인 시민 대표)

87년 대선 이후에… 뭐랄까.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래서 후배 변호사들하고 같이 하면서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서로 뜻이 맞아떨어진 거죠.

대학교 때 '조영래 변호사'의 존재는 전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장기표씨와 함께 수년째 잡히지 않고 도바리(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는 사람을 칭하는 은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연수원 수료할 때쯤에 박주현 변호사와 같이 이런저런 사무실 알아보다 박석운 소장 소개로 조 변호사님을 만났습니다.

 "같이 근무해 봅시다" 그래서 "그러겠습니다"했죠.

월급 액수도 정하지 않고 전혀 모른 채 들어갔어요. 한 달 뒤 월급 받아보고 "내 월급이 이만큼이구나" 하고 알게 됐죠. 1년 뒤쯤 보니 김앤장은 그 3배를 준 것 같더라고요.  그때 우리 월급은 100만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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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서울시장)

그 무렵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참여연대 같은 구상이셨을 텐데, 여러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모여서 연구하고 어떤 종합적 여론을 형성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하는 단체를 언뜻 말씀하신 적은 있었어요.

독재정권 시절에는 어떤 케이스 하나를 놓고 우리가 집중하고 이랬잖아요? 그런데 민주화가 되면 아무래도 그런 거는 힘드니까… 그런데 너무 아깝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런 게 실천은 못 됐던 거고.

조 변호사님이 서울대학 병원에 계실 때 문안을 갔어요. 그때는 이미 거의 마지막 단계셨는데 아주 얼굴도 초췌하시고 그러셨는데 제 손목을 잡으시더니,

"돈 이제 그만 벌어도 안 되냐? 외국 한 번 가봐라."

그래서 제가 그 후에 갔죠. 조 변호사님이 4개월인가 있었던 인권센터를 갔어요. 그 뒤로 세계를 돌아보았습니다. 조 변호사님의 권고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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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수(법무법인 시민 대표)

초창기 민변 회원들 중에는 조 변호사님이 금요모임(젊은 민변 회원들이 모여서 학습하던 모임)에 참석해서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것을 설명하면서  "이제 사회주의는 끝난 것 같다"는 의견을 말해서 '좀 놀랐다'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마지막 투혼… "권력형 부패로 국민경제가 농락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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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위헌" 판결을 받고 기자회견 중인 故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사진 중앙포토]

국제그룹 해체 사건은 조영래 변호사가 매듭짓지 못 했던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88년 찾아온 故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을 대리해 "국제그룹 해체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재산권 침해"라는 헌법소원을 89년 2월에 냈습니다. 90년 12월 조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뒤 사건은 고(故) 황인철 변호사가 맡아 마무리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황 변호사마저 세상을 떠난 뒤인 93년 7월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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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수(법무법인 시민 대표)

국제그룹 해체 사건을 맡으신 후 호텔방에 들어가서 며칠간 집중해서 기록을 보고 서면을 쓰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국제그룹 성장과정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나는 양 회장이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일반적 성장과는 동떨어진 길을 걸은 기업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부를 축적한 드문 기업인이었다. 중앙무대의 시류에 둔감했고 정치적 로비 능력과 금융기관 교제술이 박약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신준영)에 실린 조 변호사의 생전 술회

◆ 한 여름 감기처럼 찾아온 죽음… 그리고 그리움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12일 43년간의 짧지만 치열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앓던 병을 ‘시대암’이라고 진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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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故 조영래 변호사의 영결식 모습이 중앙일보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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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향아(전 조영래 변호사 사무원)

미국 연수를 다녀오셨는데, 그때가 6월말 쯤 이었나? 무더위가 시작됐을 때에요. 그러니까 차에서도 에어컨을 틀고 자주 나가시는데 가는 곳마다 냉방기가 가동됐겠죠. 어느 날은 나갔다가 들어오시더니 "냉방병인 것 같다"고 그러시면서 뭐 동네병원 다녀오셨다고 근데 또 어느 날은 이제 "그게 안 낫는다"고 "계속 한 달이나 다녔는데 안 낫는다" 그래서 갔더니, "큰 병원에 가봐라, 그러네?" 그러면서 들어오셨어요. 그렇게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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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일(변호사)

구례 군수하는 친구를 불러내서 셋이 화엄사에 차 얻어 마시고. 그날 밤에 화암사 산 넘어 천흥사라는 절에 가서 잤어요. 저하고 둘이서. 천흥사 객방에서 밤에 잠을 자는데 계속 밤에 기침을 하는 거야. 8월 달인데….

 제가 "야, 니 기침 이거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번에 미국 갔다 왔는데 과로해서 그렇다"고...

꿈속에서도 계속 기침 소리를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에 "이거 너 병원에 가봐야 되겠다.  기침 그렇게 많이 하면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 괜찮다. 좀 쉬면 된다"고.  근데 그 길로 올라가서 진단받은 게 폐암이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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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평(전 판사, 경북대 로스쿨 교수)

돌아가시고 나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덫과 같은 것이었죠. 판사라고 하는 제약 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교통사고 같은 게 일어나서 내가 갑자기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생각 밖에 못 했습니다.

경주에서 대구로 통근하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주 아름다운 산하를 보면서도… '이런 큰 분을 이렇게 일찍 하늘이 데려가시나'…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계속 줄줄 났습니다. 장례식에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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