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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즈벡·몽골 간판 빼곡, 서울 속 실크로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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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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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엔 러시아·우즈베키스탄·몽골인들이 운영하는 가게 150여 개가 몰려 있다. 지난 4일 러시아식 방한모인 샤프카를 쓴 외국인들이 골목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 중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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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지난 4일 오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5번 출구를 나오자 『은하철도 999』의 ‘메텔 모자’로 알려진 샤프카(러시아식 방한모)를 쓴 외국인들이 보였다. 길 건너편에 보이는 미확인 비행물체(UFO) 형체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때문일까. 골목 간판에 쓰여진 낯선 문자들이 ‘외계어’를 연상케 했다. 러시아·몽골 등 중앙아시아 문화권에서 주로 쓰는 키릴문자다. ‘서울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다.

서울, 가볼 만한 곳 … 눈으로 걷다 ②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
옛 동대문야구장 뒤 술집 골목
한·러 수교 후 보따리상 몰리자
각국 전통 식당·상점 타운 생겨
국내 대표적 ‘다문화 마을’ 변신

 나이 든 야구 팬들은 이곳을 동대문야구장에서 경기를 구경한 뒤 찾던 술집 골목으로 기억한다. 외국인 거리로 변하게 된 건 한·러 수교가 이뤄진 1990년부터. 동대문 의류시장을 찾는 오퍼상(보따리 상인)들이 이곳에 몰려있던 숙박업소에 행장을 풀고 사업 거점으로 삼으면서다. 러시아 의류 중개상 비알레타(42·여)는 “동대문 의류는 값이 싸면서도 내구성과 디자인이 뛰어나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이후 우즈베키스탄 등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터를 잡았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거리에서 풍기는 독특한 향기에 궁금증을 갖게 된다. 중앙아시아 음식에 빠질 수 없는 향신료 ‘즈라(Zira)’ 향기다. 이태원에서도 보기 힘든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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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리칸트’는 1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광희동의 터줏대감. 가게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우즈벡 전통의상 ‘치아판’과 현지방송을 틀어주는 TV 때문에 여행을 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주방장 샤리요르(35)는 “볶음밥 종류인 ‘플러프’와 훈제 양꼬치 ‘샤실릭’은 한국인들도 좋아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광희동 주민센터 뒤편에 있는 ‘차이하나’는 알록달록한 케이크가 눈길을 끄는 빵집이다. 러시아식 꿀케이크 ‘메도빅’과 화덕에서 구워낸 전통빵 ‘리뾰시카’가 이 가게의 대표 메뉴다. 가게 주인 마리나(31·여)는 “한국 사람들이 ‘밥심’으로 일하듯 우리는 리뾰시카를 먹어야 든든하다”고 했다.

 거리 중심부에 있는 뉴금호타운은 ‘몽골 타워’로 불린다. 10층 건물에 몽골인이 운영하는 식당·여행사와 중고 휴대폰 판매점 등이 입주해 있다. 몽골인 뭉흐자야(42)는 “타향살이에 지친 몽골인들끼리 한국 생활 정보를 나누고 옛 친구를 만나는 ‘사랑방’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3층 ‘잘루스’에선 우유에 녹차·소금 등을 넣어 만든 몽골식 전통차인 수태차를 맛볼 수 있다.

 광희동이 처음부터 화목한 다문화 마을은 아니었다. 종량제 봉투를 사서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쓰레기를 몰래 버리다 주민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 주민들의 편견 어린 시선도 적잖았다. 하지만 광희동파출소에 몽골어·러시아어 등이 가능한 경찰관을 배치하고 주민자치위원회가 나서면서 갈등이 점차 줄었다. 주민 조창대(71)씨는 “동네 행사에 초청해 함께 어울리면서 이제는 명절마다 김장을 같이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했다.

 지난 10월 서울시는 서린동(종로구)·대림동(영등포구)에 이어 광희동에 세 번째 글로벌지원센터를 열었다. 센터에선 외국인 대상 한국어 교육은 물론 현지업체와 한국의 중소기업을 연결해 주는 사업도 진행된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최근 100여 개의 낡은 외국어 간판들을 무료로 교체했다”며 “광희동을 이태원 못지않은 ‘다문화 특화거리’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장혁진 기자, 김정희(고려대 사학과) 인턴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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