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클로즈 업] 미·유럽에 바둑문화 수출 야심 남치형 교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지난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작품상.감독상.각색상.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 주인공인 천재 수학자(러셀 크로 粉)가 학창시절 프린스턴대 교정에서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온다.

"저도 그 영화 봤어요. 그런데 바둑판에 돌 놓인 모양이 엉망이더라고요."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인 프로 바둑기사 남치형(南治亨.29.사진)초단은 "그렇더라도 러셀 크로 같은 스타가 바둑을 두었다면 해외에 바둑을 보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죠?"라며 웃었다.

"아인슈타인도 바둑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기록이 독일에 남아있대요. 할리우드 스타 중에는 '타이타닉'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스토커'의 로빈 윌리엄스도 바둑 팬이죠.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이 바둑 애호가라는 사실은 모르셨죠?"

27일 서울에서는 '한국 바둑학회' 창립식이 열린다. 명지대에서 '바둑문화론''포석의 원리''바둑사' 등을 강의하는 남 교수도 이 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활약해왔다. 그는 다음달 26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국제 바둑학대회에도 참가한다.

중학교(서울 개원중) 3학년 때 프로기사로 입문했으나 '공부까지' 잘해 서울대 영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석사)했다. 대학 4학년 때는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외도'도 했다. 사시 1차에 합격했으나 정작 본인은 "1년반 가량 사법시험을 준비한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악수(惡手)였다. 시간만 낭비했다"고 단정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진 바둑이 다인 줄 알았죠.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호기심에 여기저기 많이 들여다봤죠. 인생을 바둑에만 건다는 게 못마땅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내 자리는 바둑판이더군요. TV 해설을 할 만큼 운도 따랐고. 지금은 바둑 교수가 된 게 너무 좋아요."

남교수는 요즘도 공식대회에 거의 다 참가한다. 한때 여성 바둑계의 최강자였지만 요즘엔 루이나이웨이 9단을 비롯한 '무림고수'들이 많아져 승률을 올리기가 만만치 않다. 바둑 대국 외에 그의 관심은 해외, 특히 서양에 한국 바둑을 보급하는 일에 쏠려 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이지만 바둑의 국제화 면에서는 일본에 형편없이 뒤지는 실정. 한국인이 펴낸 영어 바둑교재는 남교수가 번역한 'Jungsuk(정석) in Our Times'(정동식.서봉수 공저)가 유일하다.

"서양의 바둑도 5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1997년 IBM의 수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 세계챔피언을 이긴 뒤에는 '이제 컴퓨터가 사람을 못이기는 게임은 바둑뿐이다'는 얘기도 나오고 해서 지식인층 사이에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고 해요."

동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도 바둑문화 수출에 장애라고 한다.

"몇년 전 영국에 갔을 때 기력이 겨우 5, 6급 정도인 BBC 방송 여기자가 '실력을 늘리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기보를 많이 외우라'고 충고했더니 대뜸 '남의 기보를 외면 내 바둑을 둘 수 없지 않으냐'고 반문하더라고요. 서양인은 남의 것을 무조건 답습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수(手)를 원합니다. 서양용 바둑입문서는 이런 문화차이를 감안해 집필해야 한다고 봅니다."

남교수는 내년에 새내기 영화감독 신모(33)씨와 결혼한다. "주부 생활에 자신있느냐고요? 원래 내 꿈은 애 많이 낳고 살림하는 것이었답니다."

이세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