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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왜 후쿠야마를 만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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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 차이나랩 대표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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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중국전문기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건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논문이었다. 1989년 발표된 글에서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대결은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선언했다. 동구권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로 후쿠야마의 주장은 선지자(先知者)의 예언처럼 빛을 발했다.

강한 정부가 우선이란 주장과 함께
미국과의 체제 경쟁서 자신감 과시

 그런 후쿠야마가 최근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봄엔 중국 정부가 기획한 좌담회에 참석했고 지난달엔 칭화(淸華)대 초청으로 강연 활동을 했다. 눈여겨봐야 할 건 이런 계기를 이용해 중국 최고 지도부와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봄에는 중국의 반(反)부패 운동을 지휘하는 왕치산(王岐山)과 대담을 했다. 중국 공산당 서열 6위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외국 학자와 격의 없는 대화를 가진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어서 화제가 됐다. 지난달에는 중국의 1인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까지 후쿠야마를 만나 ‘파격(破格)’이라는 이야기를 낳고 있다.

 후쿠야마가 중국에서 뜨는 이유는 무얼까. 그가 2011년과 2014년 잇따라 펴낸 『정치질서의 기원(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과 『정치질서와 정치쇠퇴(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라는 두 권의 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책들은 후쿠야마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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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후쿠야마는 현대 정치질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로 국가(state)와 법치(rule of law), 민주책임제(accountability)를 든다. 이상적인 경우는 이 삼자가 평형을 이룰 때다. 그리고 정치질서 건설에 있어서의 우선순위는 강력한 정부를 구성하는 게 첫 번째고 이어 법치, 그리고 마지막이 민주책임제라고 말한다.

 법치와 민주책임제가 정부 권력을 견제해야 하지만 국가가 능력을 상실하면 이는 재앙이다. 시리아·이라크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중국의 성공은 강한 정부 구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반면 정부 권력이 약화된 미국은 현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고 후쿠야마는 지적한다.

 이 같은 후쿠야마의 관점에 중국이 열광한다. 환구시보(環球時報)는 후쿠야마의 말을 빌려 “중국의 발전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로벌 정치 규율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중국 매체들은 “세계에 모두 들어맞는 정치제도는 없다”는 그의 말을 소개하며 서방의 자유민주제도가 만능이 아님을 강조한다.

 여기에 시진핑과 왕치산이 후쿠야마를 만난 비밀이 숨어 있다. 시진핑과 후쿠야마(福山)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이름 모두 산(山)으로 끝나 이산회(二山會)로 일컬어지는 왕치산과 후쿠야마의 대화를 통해 중국 지도부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90분 대담의 대부분을 왕이 말해 후쿠야마의 생각을 듣겠다는 것보다는 중국의 의도를 외부에 발신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쿠야마는 중국의 반부패 운동이 궁금했지만 왕은 역사와 종교, 정치, 문화를 넘나들었다. 대담 후 후쿠야마의 입에서 “현학(玄學) 토론 같았다”는 말이 나온 연유다. 왕은 “후쿠야마가 말하는 국가와 법치, 민주책임제의 DNA는 중국에 모두 있다. 따라서 중국은 자신의 역사와 문명을 정확히 아는 데서 출발해 세계 각 민족의 장점을 흡수해야 한다”고 말해 중국이 자신의 길을 걸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중국이 현대화를 위해 걷게 될 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아주 오랜 세월을 요구하는 것이라 말한다. 13억 명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인도할 수 없기에 중국의 행보는 신중할 수밖에 없으며 이 점을 시진핑 주석이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게 왕의 이야기다.

 왕은 또 “중국과 서방 모두 본질 추구는 같지만 형식은 다르다”며 “중국 특색의 길이란 중국 공산당이 법치 등 모든 걸 이끄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당은 누가 감독하나. 이 대목에서 왕은 후쿠야마에게 ‘종교 내부의 치리(治理)는 무엇에 의지하는가’라고 묻는다. 종교가 자아 감독에 의존하듯이 공산당 또한 자기가 자기를 감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왕은 ‘의학에서 자기가 자기를 수술한 사례를 찾아봤더니 러시아의 한 외과의사가 스스로 맹장수술을 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중국이 당 기구인 기율검사위원회를 통해 당원들에 대한 반부패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바로 자아 감독에 해당하는 셈이다.

 중국은 전환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가 직접 나서 중국의 생각을 밝히곤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미국 기자 애너 루이스 스트롱과의 대화를 통해 중국의 건국 구상을 말한 것이나 덩샤오핑(鄧小平)이 미국의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마이크 월러스와 대담하며 중국 개혁·개방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 등이 그런 예다. 외부의 이해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진핑이 후쿠야마를 만난 것도 미국의 자유민주제도와는 다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걷는 중국에 대한 외부의 의혹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체제 경쟁에서의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종언(終言)을 고한 게 아니라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쇠퇴로 인해 이제 새로 시작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글=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