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살육전 없는 우아한 종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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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본선 32강전 B조>
○·펑리야오 4단 ●·나 현 5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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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보(201~211)=피비린내 자욱한 살육전은 없었다. 백도 대마를 포기하지 않았고 흑도 난폭하게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우아한 종반이랄까.

 승리가 확실해진 나현의 얼굴이 밝은 건 당연한데 패배가 분명한 펑리야오의 안색도 편안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것은 이길 수 없다는 의식이 뇌리에 각인된 순간부터 패인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되새김하면서 마음을 추슬렀기 때문일 것이다.

 11을 본 펑리야오는 웃을 듯 말 듯 묘한 표정으로 흑돌 하나를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패배의 뜻을 알리는 표시다. 계속 둔다면 ‘참고도’ 백1, 흑 2 정도인데 이후는 변화의 여지가 없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펑리야오에게 역전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복기가 이어졌다. 전체적으로 흑이 두터운 바둑이었는데 집으로는 만만치 않았다는 소감. 백이 하변에서 쓸데없는 손찌검으로 보태주지 않았으면 박빙의 계가였다는 게 중론이다.

 대국자 옆 탁자 뒤에 앉아 계시를 진행하던 소년이 기자들이 터뜨린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명멸하는 승자와 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젠가는 나도 저 안에서 빛과 그림자의 협주에 춤을 추겠지. 그런 생각일까. 꿈을 꾸는 것 같은 소년의 눈빛이 문득, 푸르다.

211수 끝 흑 불계승.

손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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