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흑, 끝없는 삼십육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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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37기 왕위전 본선리그 제21국
[제5보 (60~77)]
白.金 主 鎬 3단 | 黑.安 祚 永 7단

광활하고도 강력한 백진 속에서 흑▲ 두 점이 외롭게 떠있다.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고립된 모습이다. 김주호3단이 백60으로부터 이 두 점을 쫓기 시작했다. 흑은 이제 목숨을 건 길고 긴 도주에 나서야 한다.

60은 좋은 임기응변이다. <참고도>처럼 가운데를 갈라치면 흑은 또다시 실리를 취해버릴 것이다. 백은 13쯤 두어 중앙을 에워쌌겠지만 이곳은 과연 다 집이 될 수 있을까.

흑▲ 두 점도 아직 숨이 붙어 있고 B 부근도 엷은 기운이 감돈다. 흑이 이 백진 속으로 푹 들어오면 죽고 사는 것은 5 대 5. 승패 역시 5 대 5가 된다.

백이 유리한 형세인데 이런 바둑을 5 대 5 승부로 몰고가는 것은 어리석다.

60에 흑이 A로 받는 것은 무겁다. 보통 때라면 정수겠지만 지금 백의 창칼이 사방에서 번득이고 있는 이 시점에선 한발이라도 빨리 도망치는 게 상수다.

안조영7단은 63쪽부터 움직여 65까지 발판을 마련한 뒤 67로 달아났다. 최대한 가벼운 수법. 현금이든 패물이든 다 버리고 몸만 달아나고 있다.

68은 이젠 놓칠 수 없는 수. 이제는 흑이 A에 두면 공격이 어려워진다. 그 틈에 흑은 71로 다시 한 걸음 달아난다.

72. 金3단은 일단 두 점을 챙긴다. 후환을 없애는 두터운 수법. 순간 安7단은 73으로 어깨를 짚어 77까지 파고든다. 흑은 참 엷다.

동시에 새털처럼 가볍다. 安7단의 전략은 명백하다. 상대가 몸이 아니라 꼬리를 원하면 언제든지 떼어준다는 전략이다.

흑은 50집의 확정가를 갖고 있다. 백집은 어디 있나. 손만 뻗으면 이곳저곳 챙길 곳은 많지만 아직 확정된 곳은 몇 집 안 된다.

검토실에선 백이 상당히 유리하다고 하는데 구경꾼의 눈엔 승리를 굳히는 방법이 막막할 뿐이다. 金3단은 이 바둑을 과연 어디서부터 요리해갈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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