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올바른 기억을 바란다면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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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호 31면

15년 전 일본 도쿄대에 유학할 때의 일이다. 인상깊게도 법학정치학부에서는 한국 정치외교학과의 일반적인 커리큘럼과 달리 일본 정치외교사나 일본 정치사상사가 핵심적인 과목의 하나였다. 수업 시간에는 근현대 일본의 틀을 만들었던 주요 정치가와 사상가의 일기나 저작을 학생들에게 읽히면서 당대의 정치와 사회를 깊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예컨대 우리에게는 식민지화의 원흉으로 알려져 있지만, 메이지 시대의 헌법과 정치제도를 설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일기를 읽히면서 당대의 정치외교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전후 평화헌법을 제정하고 미·일동맹 체결을 주도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회고록도 읽히면서 현대 일본이 어떤 전략 하에서 재건국되었는가를 이해하게 하였다. 그래서 비중 있는 정치가들이 사망하면 그 유족들이 일기나 저작 등 고인의 관련 자료를 주요 대학의 도서관에 기증하여 연구자료로 제공하던 관행도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여 흥미로웠다.


수년 전 미국 대학에서 안식년 연수를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버드대 등 미국 명문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조지 워싱턴이나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남긴 문서들을 교양서적처럼 읽히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건국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계승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본 명문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대학에서도 역사학과가 아니라 정치학과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러한 정치외교사 교육을 강조하는 것도 인상깊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미국이나 일본 대학에 비해 우리의 주요 대학 정치학과나 역사학과 커리큘럼에서는 현대 정치외교사나 정치사상 분야의 교육과 연구가 전반적으로 미흡하다.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관련 분야가 연구되고는 있으나, 자료의 발굴이나 학과목 개설은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 크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 건국의 주역들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의 연설문이나 일기 등 자료집 발간도 활발하지 못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는 재임 당시 비서실에서 매년 연설문집을 간행하여 주요한 참고가 되긴 하지만, 그 일기나 서한 등의 자료집이 간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현실은 북한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난다. 대외 선전목적도 있겠지만 북한 당국은 김일성이 1930년대 항일 투쟁 당시 행했다는 연설까지도 수록한 전집과 선집을 수 차례 간행하였고, 북한 주민들에게 읽히고 있다. 물론 북한의 경우 이러한 자료집의 간행이 우상화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그렇지만 북한 청년들이 적어도 자신들의 지도자가 어떤 생각으로 국가를 건설해 왔는가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요컨대 미국·일본·북한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어떤 생각으로 국가를 건설했는가를 기억하면서 사회의 성원으로 자라나고 있지만, 우리의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의 기회 자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앞으로 건설해 갈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교과서 제작 방식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의 국가공동체가 어떤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가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미래의 국가건설을 위한 논의에서도 그러한 기억들이 지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역사교과서 제작을 주도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대학이 나서서 국가공동체가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박영준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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