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자연이 다 아름다운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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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년 동안 독자들과 함께 과학으로 세상을 보아왔다. 그 세상은 과학기술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 세상으로부터 1백50억년 전 초기 우주까지 광범위한 세상이었다. 1년을 마무리하면서 인간 세상과 대자연의 공통점을 짚어보기로 하자.

피아노에는 88개의 건반이 있다. 건반을 하나씩 치면 하나의 음만 나오지만 코드(chord)에 맞춰 몇 개의 건반을 동시에 두드리면 아름다운 화음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하나 하나의 구성요소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질서를 이루는 것은 세상만사의 기본 이치다. 가족도, 국가도, 지구촌의 국제사회도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이익과 전체의 질서 사이의 균형을 찾아간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태양계에서는 태양과 9개의 행성이 뉴턴의 법칙에 따라 다이내믹한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가 속한 은하수는 천억개 별들의 중력 작용과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나선형 구조를 갖게 됐다. 우주 전체로는 천억개의 이러한 은하가 공간의 팽창에 따라 서로 멀어져 가고 있다.

우리 몸은 약 1백조개 세포의 연결체다. 세포마다 들어있는 DNA 분자에서는 두 개의 나선이 수소결합에 의해 이중나선이라는 관계를 유지한다. 하나의 나선에서는 유전 정보를 기록하는 염기와 당, 그리고 인산이 구성요소가 되고 이들은 화학결합으로 연결된다.

염기.당.인산의 구성요소는 수소.산소.탄소.질소.인의 원자들이고 이들 역시 화학결합으로 연결된 분자다. 생명의 매트릭스인 물도 수소와 산소 원자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분자다. 생명현상은 분자 레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원자의 내부에서는 양성자와 전자가 전자기적 인력으로 붙잡혀 있고, 원자핵에서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핵력에 의해 붙잡혀 있다. 양성자와 중성자의 구성요소는 강한 핵력으로 상호 작용하는 쿼크라는 궁극적인 입자들이다.

피아노에 88개의 건반이 있듯이 생명의 언어인 화학의 세계에는 약 90가지의 원소가 있다. 각각의 원소는 하나의 음과 같다. 그런데 몇 가지의 원소가 화합하면 놀라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수소라는 건반과 산소라는 건반이 만나면 물이라는 화음이 생겨난다. 흥미롭게도 피아노 건반에 옥타브마다 돌아오는 주기가 있듯이 원소의 세계에도 주기율이 있다.

피아노에도 많이 사용되는 키가 있듯이 90가지의 원소 중에도 수소.산소.탄소.질소.인.황같이 생명에 많이 사용되는 원소들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합물 중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자인 DNA도 있고, 장미꽃의 색을 나타내는 화합물도 있다. 그런가 하면 놀랍게도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은 탄소라는 건반 하나에서 나온다. 허블망원경이 보여주는 성간 공간의 장밋빛은 수소의 스펙트럼에서 온다.

동료 최재천 교수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을 썼지만, 나는 생명 없는 것도 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생명은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중간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이다. 생명 없는 쿼크와 렙톤의 코드에서 원자와 분자가 만들어지고, 원자와 분자의 코드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한편 허블망원경이 보여주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거시세계는 우주의 역사와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한 비밀을 품고 있다. 생명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그래서 아무리 문제가 많다 해도 인간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생명 없는 것도 다 아름답다. 그래서 자연은 다 아름답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