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침묵’에 숨은 의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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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호 31면

셜록 홈즈가 스코틀랜드 야드(런던 경찰국) 형사와 살인 사건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증거와 함께 “사건 당일 개 한 마리의 수상한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형사는 “그 개는 그 날 밤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홈즈는 “(짖지도 않았다니) 그거야말로 이상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11월 1일 북한을 빼놓고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3국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을 확고히 반대하는 입장을 재확인한다”는 공동성명을 내놨다. 미국이나 미국의 어느 한 동맹국이 이런 성명을 내는 일은 흔하지만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3강(强)의 공동성명은 북한에 위협적이다.


조선중앙통신은 3국 정상회의를 비난하고 ‘내정에 간섭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보도를 낼 법하다. 하지만 셜록 홈즈의 개처럼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즈음 유일한 관련 보도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회담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 번 칼럼에서 나는 중국 권력서열 5위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의 평양 방문이 북·중관계 개선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강조했다. 3국 정상회의에 대한 조선중앙통신의 이상한 침묵은 류윈산 방북을 빼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용기있게 추측해 본다면 류윈산은 북한에게 ‘3국 정상회의가 열릴 것이고 비핵화에 대한 공동성명이 나올텐데, 거기에 북한이 도발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중국으로선 언짢을 것’이라고 미리 알렸을 것이다.


류윈산 방북의 여파는 또 감지된다. 북한은 10월 10일 이후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사일이나 핵실험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마식령 스키장 건설에 더 힘을 쏟는 분위기다. 이 기간 몽골 국방장관과 러시아 제1합참차장 니콜라이 복다노프스키가 잇따라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은 이제 역내 군사협력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기로 방향을 전환한 것일까. 그렇다면 류윈산 방북시 중국이 그런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일까.


물론 이는 새로운 가설일 뿐이고 증거도 미미하다. 한 달 밖에 안 된 일이라 결론을 내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가설이 맞는지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첫째,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북한은 외부로부터 공격받았을 때 더 확실한 군사지원을 중국에 요구했을 것이다. “(북·중) 고위급 접촉을 이어가겠다”는 김정은의 10월 10일 발언이 조만간 중국을 방문하겠다는 뜻이라면, 1961년 체결된 조·중 우호조약이 격상될지 지켜볼 일이다. 둘째, 북한은 몽골·러시아 국방관료의 방북에 대한 답방을 해야 한다. 역시 61년 북한이 소련과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은 90년대 들어 공격을 당했을 때 서로 연락하는 정도로 격하됐다. 북·러 군사관계의 강화가 추진되면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 통일에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한국이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인센티브는 물질적인 풍요다. 시진핑의 친서가 중국의 경제원조 재개를 선언한 것으로 보면, 북한 입장에선 한국의 돈을 받아내자고 대한민국 정부와 협상할 이유가 그만큼 줄어든다. 물론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서 지원을 받으면 좋겠지만 중국의 원조만으로도 정권 유지에 필요한 ‘평양 엘리트 그룹’의 기대는 충족할 수 있다.


북한에 있어 발전적인 대남 관계는 정권 유지에 위협적이기도 하다. 한국은 언젠가 북한을 접수할 야망을 갖고 있는 국가로 비친다. 또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통일이 된다 해도 북한 정권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불편한 진실을 들춰낼 것이 자명하다. 편한 사이인 중국에서 원조를 받을 수 있다면 왜 고생해가며 한국에 손을 벌리겠는가.8월 25일 합의된 남북 고위급 회담은 아직도 열리지 않고 있으며, 열릴 가능성이 커 보이지도 않는다. 중국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고위급 회담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이겠지만 남북이 통일을 향한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대해선 급할 것이 없다. 북한에게 강하게 독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용기있는 움직임이었지만 새로운 북·중 밀월 속에선 진전을 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북한은 수년간 통일 논의는 ‘우리 민족끼리’ 즉 외세를 배제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미국을 끌어들인다며 한국을 비난해 왔다. 그런 북한이 요즘 ‘우리 민족끼리’를 버리고 중국에 의존하게 된 것 같다. 북한이 중국을 후원자로 여기는만큼 중국은 한반도 통일 과정에 어떤 형식으로든 목소리를 내려고 할 것이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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