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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조덕현(현대미술가·이화여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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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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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흐르는 물 간다 한들 끊어지며

기울고 돋는 달도 아주 소장*되단 말가

- 소동파(1037~1101), ‘적벽부(赤壁賦)’ 중에서

판소리 단가 의역. *소장(消長) : 없어지거나 커짐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해가도
기억은 남아 시간을 이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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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 아주 어둡던 시절에 가헌 최완수 선생의 보화재(간송미술관)를 출입하며 배움을 얻어 이후로 삶과 작업에 새로운 각오를 다진 바 있다. 주로 화분을 옮기는 등 잡일을 도와드리며 한편에서 한문공부를 했는데 그보다도 가끔씩 선생이 들려주신 말씀이 마음에 더욱 와 닿았던 듯하다. 적벽부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어느 이른 가을밤 보화각 옥상에서 주흥이 도도해지신 선생이 달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한참 읊으셨는데 그것이 동파 소식의 적벽부이며 바로 그날이 임술년(1982년) 음력 7월 16일로, ‘임술 가을 칠월 기망에’로 시작되는 적벽부의 시간과 동일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언 30여 년 전의 그 인상적인 밤은 나의 회상으로 인해 지금 여기에 소환된다. 아울러 1000년 전 동파의 감회가, 그리고 적벽부에 그려지는 1800년 전 적벽대전의 정황이 함께 불려옴이니 막대한 시간의 중층을 단숨에 넘는 우리의 기억과 상상력이 새삼스럽다. 강물이 흘러서 모두 사라지며, 기울고 차오르는 달이 아주 없어지거나 아주 커지는 것이 아니듯 우리의 몸과 현실은 변할지라도 우리의 기억은 그렇지 않아 영원하다. 오랫동안 추구한 내 작업의 주제가 그와 흡사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 읽은 적벽부가, 아니 보화재의 날들이 나를 흔든 것이 맞는다 할 것이다.

조덕현(현대미술가·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