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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꾸중 안 하는 간송 가문, 식당서 떠들면 회초리 듭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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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손자 전인건씨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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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간송 전형필 선생, 아내 김점순 여사, 장녀 명우, 장남 성우, 그리고 유모 품에 안긴 아기는 차남 영우. [사진 간송미술관]

개인의 자유보다 예의와 배려를 더 중요시 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에게도 피해 안 줘
평생을 재단에 헌신한 아버지, 간송보다 존경

전인건(44)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의 할아버지는 간송 전형필이다. 간송(1906~62년)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보호에 앞장섰다.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와 도자기, 불상, 석탑 등을 수집해 보존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간송이 수집한 우리 문화재를 모은 개인 박물관이다. 전인건 사무국장을 만난 건 보성고 이사장실에서였다. 이사장실은 간송의 장남인 전인건 사무국장의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의 사무실이다. “학교에 접견실이 따로 없어 이사장실에서 뵙습니다.” 전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사장실에 있는 물건이라곤 소박한 나무 책상과 20년은 족히 됐을 법한 낡은 소파, 누렇게 색이 바랜 오래된 팩스, 1956년 이마동 화백이 그린 간송의 초상화, 전통 민화 한 점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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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족 사진. 오른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인건 사무국장,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 전 사무국장의 딸 재은, 어머니 김은영 매듭장, 남동생 부부. [사진 간송미술관]

전 사무국장은 할아버지 간송을 빼닮았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그렇다.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남들 앞에 나서는 걸 꺼린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 치하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해 신념을 잃지 않고, 전 재산을 바쳐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의 굳은 심지를 이어받았다.

전 사무국장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을 꼽았다.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할아버지 간송이 아닌 아버지 전 이사장을 존경한다고 답한 이유를 그는 “더 큰 목적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지금까지 왔으니까요”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전성우 이사장(81)은 아버지 간송이 급성신우염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자신의 꿈을 접고 간송미술관과 보성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데 젊음을 바쳤다. 67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시작했고, 71년부터는 간송미술관의 이름으로 매년 두 차례 주제를 정해 연구하고 그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도 만들었다. 전 사무국장은 아버지를 도와 10년 전부터 보성고 재단인 동성학원에서 일해왔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동성학원과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적극적인 대중화도 꾀하는 중이다.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친 아버지

“제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집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계셨어요.”

전 사무국장을 포함한 네 자녀가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게 된 건 언제나 책을 읽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다. 한 번도 공부하라거나 책을 읽으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말보다 실천을 통해 아이들에게 스스로 느끼게 했다.

말보다 행동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건 간송이 아들 전성우 이사장에게 했던 교육 방식이다.

“아버지가 학창시절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다가 공놀이를 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유화 물감과 붓, 팔레트는 바로 씻지 않으면 굳어서 못 쓰게 되거든요. 서너 시간 놀고 오니 할아버지가 깨끗이 씻어두셨더래요. 아버지는 혼날까 봐 조마조마하셨는데, 할아버지는 그냥 모르는 채 아무 말도 안 하셨다고 해요. 그 후로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엔 붓과 팔레트를 언제나 씻어두세요. 80세가 넘으신 지금까지도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시죠.”

격주 주말마다 전 사무국장은 외할아버지 김광균 시인과 어머니 김은영씨의 손을 잡고 호암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봤다. 김광균은 시 ‘와사등’‘설야’ 등으로 유명한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어머니는 매듭 장인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막내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대학원에 진학해 염색학을 공부했다

“어린 제가 그림 구경을 하느라 뒤처지곤 했는데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번도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신 적이 없었어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제가 그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려 주셨죠. 제가 묻기 전에는 그림에 대한 설명도 안 하셨어요. 스스로 그림을 감상하고 느끼라는 뜻이었죠.”

“누구에게나 인사하고 존대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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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분청사기 문진(文鎭). 전 이사장을 거쳐 현재 사무국장이 사용하고 있다. [사진 간송미술관]

큰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아버지였지만 자녀들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면 꾸지람을 하고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집안에서 만난 어른들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인사하고, 반드시 존댓말을 쓰도록 가르쳤다.

“저희 4남매는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다가 종아리를 맞기도 했고, 호통을 듣기도 했죠. 공공장소에서는 개인보다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는 게 개인의 자유보다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는 할아버지 간송과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유산을 ‘배려와 예의’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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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보성고등학교 창립 80주년 기념식 당시 3.1운동을 기념하는 의미로 주조한 보성종.

배려와 관련해서는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조상은 원래 고려시대 말기 문관의 집안이었는데 조상 중 한 명이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해서 고향인 정선으로 낙향했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상황이 됐다. 당시 그의 조상은 뭐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산에 갔다가 동굴에 누군가 숨겨놓은 쌀 다섯 말을 발견했다. ‘이거면 우리 가족 살겠구나’ 싶어 들고 오려다 ‘내가 이거 가져가면 이거 숨겨놓은 사람은 굶어야 하지 않나’하고 다시 내려놓고 왔다. 그 이후 가문이 부를 쌓았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가족을 위해 그것도 못하나’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희 가족은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 배려심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가 귀한 줄 알아야 남 귀한 줄도 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힘도 여기서 나온다. 학교 행정업무를 10년째 맡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미래를 향한 꿈도 꿀 수 있다. 가정 안에서 서로 배려하고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게 된다.”

- 자신을 귀하게 여기도록 하려면.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가르쳐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한 번도 ‘이런 분야가 좋다더라. 이렇게 해봐라’는 권유를 안 하셨다. 그저 자녀들의 선택을 인정하고 묵묵히 응원해 주셨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을 하고 실패도 해보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나를 사랑하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에서 타인과의 동질감, 배려심, 이해와 존중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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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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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

4남매는 각각 다른 길을 선택했다. 큰누나는 미술사를 공부해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으로 일하고 있다. 미대를 나온 작은누나는 국민대 강사로 출강 중이고, 남동생은 미국 회계사이자 컨설턴트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 사무국장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 역사를 전공한 계기는.

“고등학교 때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구절이 있다.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역사책을 읽기 전에 그 책을 쓴 역사가를 공부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가에 의해 선택된 사실의 나열이다. 어떤 것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사관이 달라지고 결국에는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이었다. 역사의 힘이란 그렇게 큰 것이구나,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 그래서 필요하구나 느꼈고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간송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역사의 산물인 문화재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 딸에게는 어떤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나.

“내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내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것처럼 딸에게도 배려와 예의를 알게 하고 싶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달라져 아이들의 감수성도 내가 자랄 때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실천으로 보여주면 결국 이해하고 따라오는 것이 가정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4년 전 딸이 미국에 지내러 갔을 때 건넸던 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는 없는 존재다. 어딜 가든 늘 마음 터놓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들은 늘 마음을 열곤 한단다. 단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항상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마음으로부터 배려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민족의 유산을 지킨다는 압박감

- 가문의 유산이자 민족의 유산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부담감이 있을 것 같다.

“압박감이 늘 있다. 평생 짊어지고 노력해야 할 목표다. 문화재는 나 개인이 받은 유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다. 내 것도 아니고 우리의 것도 아니다.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줘야 하는 것들이다. 데카르트의 명언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내 좌우명이다. 나는 이 말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게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 개인 전인건이 아닌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사무국장 전인건으로서 선대로부터 최고의 유산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나.

“자존감이다. 간송께서 처음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을 당시 일본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뛰어난 우리가 왜 일본에 점령을 당했을까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뛰어난 민족인 만큼 반드시 광복은 이룰 것이고 그렇다면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이 다시 자리를 잡기까지 지식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셨다. 그 결과물이 바로 개인으로의 자존감이자 국민으로의 자존감을 지키는 우리 얼이 담긴 문화재 수집이었다고 한다. 정신과 생각은 한 나라와 문화를 말살시킬 수도 있고, 사라진 문화를 다시 꽃피우게도 하는 힘의 근간이다. 민족적 자존감을 배우고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조상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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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건 프로필

1971년 서울 출생
84년 성신여자사범대 부속초등학교 졸업
87년 보성중학교 졸업
90년 보성고등학교 졸업
99년 미국 루이스앤클라크 칼리지 역사학과 졸업
2004~현재 학교법인 동성학원 법인사무국장, 보성중고등학교 행정실장
2010~2013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미술관 행정지원 실장
2013~현재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

내 인생의 롤 모델: 아버지 전성우 이사장
내 인생을 바꾼 책: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 초등 4학년부터 고교 졸업까지 5번 이상 완독했다. 역사란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을 담아 기록하는 그릇이고 이 그릇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다.
딸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J.R.R 톨킨의 『호빗』. 문장과 스토리가 가진 힘, 철학과 사상, 역사관이 단단하게 다져진 서사를 지닌 책이다.
좌우명: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주요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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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왼쪽 시계 방향으로 훈민정음(국보 제70호), 김홍도의 황묘농접,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신윤복의 단오풍정.

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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