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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넘나들기는 내 예술의 핵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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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8 면

1 퐁피두 메츠에 선 김수자

수천 년 나이를 먹은 프랑스 북동부 도시 메츠에 아주 젊은 미술관이 하나 있다.


파리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인 퐁피두 센터가 5년 반 전에 세운 분관, 상트르 퐁피두 메츠(Centre Pompidou Metz)다. 스타 건축가 시게루 반과 장 드 가스틴의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또 여러 참신한 전시들의 힘으로, 세계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새로운 명소로 부상한 곳이다.


이 미술관은 3개의 주요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드물게 단일 작가의 단일 미술 프로젝트에 3개 중 1개의 갤러리 전체를 내주었다.


바로 한국 작가 김수자(58)의 ‘투 브리드(To Breathe)’ 프로젝트다. 이 전시는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2015-16 한불 상호 교류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1월 4일까지 진행된다.


10월 25일 열린 전시 프리뷰 현장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3 퐁피두 메츠의 독특한 디자인은 일본의 스타 건축가 시게루 반과 프랑스 건축가 장 드 가스틴에게서 나왔다.

2 김 작가는 미술관 창문을 반투명의 회절격자필름으로 덮었다. 그래서 창 밖으로 보이는 메츠의 고풍스러운 풍경은 그 형태가 흐릿하고 색채가 무지갯빛 스펙트럼으로 분산되어 어른거린다.

파리에서 고속열차 TGV를 타고 1시간 반. 메츠의 첫 인상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도시라는 느낌이지만, 사실 파란만장한 역사를 품은 곳이다. 독일 국경에 접한 로렌 지방의 주도이고, 두 나라의 알력 사이에서 국경이 바뀔 때마다 독일 영토와 프랑스 영토가 되기를 반복했다.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역 건물만 해도 복잡한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메츠가 독일 영토였던 20세기 초,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뜻에 따라 특별히 건설된 역인 것이다.


역 건물을 나와 5~6분 정도 걸으면 퐁피두 메츠를 만나게 된다. 이재민을 위한 임시 종이 건축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2014년 프리츠커 수상자)과 프랑스 건축가 장 드 가스틴의 작품이다. 눈 쌓인 산이나 모자를 연상시키는 지붕이 인상적인데, 놀랍게도 비정형 곡선을 그리는 지붕의 골조가 나무다. 그와 함께 지붕 사이 혹은 밑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직사각형 공간이 이색적이다. 지붕 끝은 나무 골조 때문에 한옥 등 동아시아 목조건물의 처마를 연상시킨다.


정문 위 직사각형 공간 창에는 미술관의 주요 3개 갤러리에서 지금 진행 중인 전시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정신 작용에 관한 미술작품들을 다룬 그룹전 ‘Cosa Mentale’, 미국 팝아트 제왕 앤디 워홀 회고전 ‘Andy Warhol Underground’, 그리고 김수자 개인전 ‘Kimsooja: To Breathe’다.

4 갤러리 중앙 바닥에는 커다란 사각형 색면이 영사되어 끊임없이 색채를 바꾼다.

5 낮에는 햇빛 때문에 이 색면이 영상이 아니라 바닥에 펼쳐진 색종이처럼 보인다(왼쪽). 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면 색면의 빛이 천장과 인접한 벽을 물들이며 퍼지기 시작한다(오른쪽).

6 갤러리를 채우는 신비한 숨소리, 허밍 코러스 같은 소리도 작품의 일부다.

“김수자의 작품은 미술사를 다시 읽는 작업” 미술관의 제 2갤러리에 들어서면 80m 길이의 크고 긴 공간이 아무 가벽 없이 탁 트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미술 작품을 세심하게 비추는 인공 조명도 전혀 없다. 갤러리 양쪽 끝의 커다란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는 부드러운 자연광만 있을 뿐이다.


김수자 작가는 그 창문을 반투명의 회절격자필름으로 덮었다. 그래서 창 밖으로 보이는 메츠의 고풍스러운 풍경은 그 형태가 흐릿하고 색채가 무지갯빛 스펙트럼으로 분산되어 어른거린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런던 국회의사당 그림처럼. 이렇게 변형된 창 밖 풍경은 작가가 물과 같은 거울로 덮은 바닥에 반영된다. 그리고 신비한 숨소리, 때로는 허밍 코러스 같은 소리가 갤러리를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작가의 들숨과 날숨의 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여러 겹으로 겹친 소리다.


갤러리 중앙 바닥에는 커다란 사각형 색면이 영사되어 숨소리에 반응하듯 끊임없이 색채를 바꾸고 있다. 파랑, 보라, 주황, 노랑…. 낮 시간에는 햇빛에 눌려 이 색면은 영상이 아니라 바닥에 펼쳐진 색종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가 기울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약해지면, 색면의 빛이 천장과 인접한 벽을 물들이며 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몇 시간씩 머물러 있고 싶어지죠.” 퐁피두 메츠의 엠마 라빈 관장이 말했다. “사실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림 앞에는 불과 몇 초만 멈춰 서있을 뿐이잖아요. 그러나 수자의 작품은 관람자들이 몇 시간씩, 때로는 하루 종일, 전시장에 머무르도록 이끌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변화를 지각하면서요.”


관장이 말을 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미술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미술사’라는 말을 듣고 보니, 반투명 회절격자필름을 통해 보이는 인상주의 회화 같은 창 밖 이미지와, 갤러리 가운데 영사된 사각형의 가변적 모노크롬(단색 추상) 회화 같은 모습이 모던아트의 변천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관장은 김 작가에 의해 변형된 갤러리 공간 자체를 하나의 회화로 보는 관점이었다. “(장소특정적 설치미술이지만) 회화적 성격이 있어요. 이브 클랭과 카지미르 말레비치처럼 모노크롬 회화를 개척한 아티스트들이 제기했던 색면에 대한 질문, 그 질문을 이 작품은 이어받고 있습니다. 수자의 경우는 벽에 회화를 걸고 관람객이 보게 하는 대신, 관람객이 마치 모노크롬 회화와도 같은 그녀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거죠.”


라빈 관장의 견해에 동의하며 김수자 작가가 덧붙였다. “이번 작품은 일종의 3차원 회화입니다. 사실 내 예술은 회화에서 시작됐어요. 이번 메츠 프로젝트는 회화의 한계 또는 경계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실험입니다.”

7 김수자의 작품 ‘To Breathe’는 미술관 1층 로비로도 연결된다. 1층 로비의 창 역시 반투명 회절격자필름으로 덮어 무지갯빛을 연출했다.

8 퐁피두 메츠 미술관 외부에서 본 김수자의 작품. 9 밤이 되면 창문이 만드는 무지갯빛 스펙트럼이 두드러지고, 그 빛이 작가가 물과 같은 거울로 덮은 바닥에 반영된다.

회화의 한계 혹은 경계는 어디인가에 대한 실험 김 작가는 특히 갤러리 중앙에 영사되는 색면이 낮에는 햇빛에 의해 경계가 뚜렷하게 지어져서 마치 물감을 칠한 종이 같이 보이지만(정말 그렇게 보인다!), 햇빛이 약해지면 색면의 빛이 인접한 공간을 침범하기 시작하는 사실을 강조했다. “나는 회화의 실제 표면이 어디에 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를 국제적 스타로 만든 퍼포먼스-비디오 작품 ‘보따리’ 연작과 ‘바늘 여인’ 연작을 생각하면, 그가 홍익대에서 본래 회화를 전공했다는 사실과 회화의 경계에 대해 탐구해왔다는 말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2015년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 작가는 런던-베를린 기반 현대미술 리서치 사이트인 아트팩츠넷(ArtFacts.Net)의 2015년 세계 미술가 랭킹에서 241위를 차지하며, 한국인 중에서는 39위의 백남준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트팩츠는 미술관·비엔날레 전시 이력과 아트페어·경매 결과를 종합해 미술가의 명성 순위를 측정하는데 2015년 현재 1위는 앤디 워홀, 2위는 파블로 피카소다. 300위 안에 드는 생존 한국 미술가는 김수자와 294위의 양혜규 뿐이다.


이러한 김 작가의 국제적 인지도의 출발점은 1997년 보따리 수백 개를 트럭에 싣고 11일 동안 우리나라 곳곳을 달린 퍼포먼스와 그것을 기록한 비디오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km’였다. 그는 보따리 트럭을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전에 전시해, 가장 가변적이고 유연한 여행 짐인 한국의 보따리(bottari)를 알리고 그 유목민적, 탈경계적 함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했다.


1999년부터는 세계 여러 대도시의 바삐 걷는 인파 속에서 몇 시간이고 말없이 우뚝 서 있는 퍼포먼스와 그것을 비디오로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비디오를 보면 작가는 관람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고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옷과 길게 묶은 검은 머리만 보인 채 끊임없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군중의 물결을 겹겹이 꿰뚫는 검은 바늘처럼 서있다. 그러니 이 퍼포먼스-비디오 연작의 제목이 ‘바늘 여인’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김 작가에게 생긴 별명이 ‘보따리 작가’ ‘바늘 여인’이다. 이런 전작들의 세계가 그의 “회화의 경계에 대한 오랜 관심” 및 이번 퐁피두 메츠 프로젝트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10 김수자를 국제적 스타로 만든 퍼포먼스-비디오 작품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km’(1997).

11 영상시와 다큐멘터리의 중간에 서있는 김수자의 비디오 작품 ‘실의 궤적’(2010)이 2014년 구겐하임 빌바오에 전시된 모습.

12 김수자가 만든 미국 라틴 아메리카 이민자들의 집단 초상 비디오작품 ‘앨범: 소잉 인투 보더라인’(2013)은 지난해 미국 연방정부의 의뢰에 따라 애리조나의 멕시코 국경지역 마리포사 육로 입국장에 대형 LED 스크린으로 영구 설치됐다.

“2차원과 3차원을 오가는 보따리는 영감의 원천” 라빈 관장의 집무실로 옮겨 계속된 인터뷰에서 김 작가는 그 점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영사된 색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 빛과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온 자연 햇빛이 반복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은, 호흡에 대한 나의 오랜 관심, 그리고 바느질에 대한 오랜 관심과도 이어집니다. 숨 쉬는 것은 들숨과 날숨의 반복입니다. 또 바느질은 바늘이 천의 안팎을 들락거리는 반복이죠. 즉 이들 모두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고 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십 년간 김수자 작품의 모티프였던 보따리와도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보따리는 펼치면 2차원 평면이지만 물건을 넣고 싸면 3차원 입체가 된다. 2차원 모노크롬 회화를 3차원으로 재현한 그의 퐁피두 메츠 프로젝트는 일종의 보따리다. 그리고 보따리는 가방과 달리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가 매우 유연하고 가변적이다.


“김 작가가 경계의 개념을 탐구하는 것이 메츠에서는 더욱 의미 깊다”면서 라빈 관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왜냐하면 메츠가 주도로 있는 로렌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의 알력 사이에서 계속 국경이 변하면서 그때마다 국적이 바뀐 지역이기 때문이죠.”


국경과 그것을 넘나드는 사람들인 이주민들 또한 작가의 오랜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것이 발전한 작품 중 하나가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바 있는 ‘앨범: 허드슨 길드’(2009)다. 이 30분 남짓한 동영상은 검은 배경에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회색 머리의 노인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준다. 이들은 대개 이민자 출신인 뉴욕 첼시의 주민들이다. “참가자들이 마침내 자기 생각에 빠져들게 됐을 때” 작가는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순간 돌아보는 그들의 얼굴은 깊은 주름에도 불구하고 페르미르(베르메르)가 그린 ‘진주귀걸이의 소녀’의 얼굴만큼 아름답고 미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2012년 인터뷰에서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얼굴을 돌리는 순간 떠오른 제각각의 표정에는 각각의 삶 속 시간의 흐름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참가자들의 개인적 역사와 추억이 압축된 초상화의 집합이죠.”


이 작품에서 발전시킨 미국 라틴 아메리카 이민자들의 집단 초상 비디오작품 ‘앨범: 소잉 인투 보더라인’(2013)은 지난해 미국 연방정부의 의뢰로 애리조나의 멕시코 국경지역 마리포사 육로 입국장에 대형 LED 스크린으로 영구 설치됐다.


이렇듯 김수자 작가의 작품세계는 3차원 가변 모노크롬 회화인 퐁피두 메츠의 ‘To Breathe’부터 ‘보따리’ 연작과 ‘바늘 여인’ 연작, 이민자들의 집단 초상화 비디오에 이르기까지 그 매체와 시각적 결과에 있어서 상당히 다양하지만, ‘경계에 대한 탐구’ ‘경계를 넘나들고 안팎을 잇는 것에 대한 연구’라는 테마에 있어서는 놀라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김수자의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바느질이 어떤 매체와 시각적 결과로까지 확대될지 궁금할 뿐이다. ●


메츠(프랑스) 글·사진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symoon@joongang.co.kr 사진 퐁피두 메츠·국제갤러리·김수자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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