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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산책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말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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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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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민
스님

혹시 어렸을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크셨나요?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척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절대 거스르지 않고, 어려운 일이 좀 있어도 불평 없이 잘 참으셨는지요. 성인이 된 지금도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하며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고 계시나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도,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나만 좀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그냥 아무 말 없이 넘어가고, 또 남에게 상처 될 만한 말이나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는 말은 잘 할 줄도 모르고요.

 가끔씩 저에게 상담을 청하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로 착한 분들이 심리적 우울증이라든가 공황장애, 시댁이나 직장 관계에서 오는 화병 같은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말씀도 차분하고 성품 자체가 순해 남들에게 배려도 잘하지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나 생각하는 방향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다른 것을 더 원하면 나 하나 희생하는 것쯤이야 몸에 배인 분들이지요. 이렇게 착한 분들에게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이런 마음의 시련을 주시나 안타까웠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착하다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말할 때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타인의 요구를 잘 따라 주는 사람을 착하다고 칭하는 것 같아요. 즉 본인도 분명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방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표현하지 않고 남의 의견에 순종하는 것이지요. 내 말을 잘 들어주니까 당연히 그 사람을 편한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 칭찬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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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꼭 다 그렇다고 단정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착한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렸을 때 부모님 등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패턴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성격이 강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라 부모님께 원하는 것을 해 드림으로써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컸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부모님 서로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경우, 나라도 말을 잘 들어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편하게 해 드려야지 하는 마음을 쓰신 분들이거나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타인의 요구에 맞춰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욕망이나 감정들에 소홀해진다는 점입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소외시키고 무시하니 어른이 돼서도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대체 누구인지 잘 몰라요. 더불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니 상대를 향했어야 할 정당한 분노가 내면에 갇혀 본인 스스로를 공격하게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화도 제대로 못 내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일까?’ 하고 말이지요.

 우선 이 점을 꼭 기억해 주세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시당해도 되는 하찮은 것들이 아니라 나로부터 관심받을 만한 아주 소중한 것들이라는 사실을요. 나는 남들이 원하는 일을 잘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 자체가 사랑받을 만하다는 사실을요. 또한 내 안의 감정을 내가 억압하고 무시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많은 마음의 문제가 억압이 습관화되면서 그 억압된 감정의 에너지가 건강하게 흐를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서 생겨요. 물도 흘러야 좋은데 한곳에 고이면 썩는 것처럼 감정도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남들이 나에게 하는 기대를 따르기 이전에 내 안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그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사람들로부터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는 요구가 있어도 내가 정말로 하기 싫다는 감정이 올라오면 그것을 해 주며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나를 소진시키지 마세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해 보는 노력을 해 보세요. 혹시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관계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상대는 내가 그런 느낌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요구했을 수 있어요. 미안해하지 말고 간결하고 상냥하게 내 느낌을 말하시면 됩니다. 쌓였던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하세요. 예를 들어 남들이 다 짜장면을 먹겠다고 해도 내가 볶음밥을 먹고 싶으면 ‘나는 볶음밥 먹을래요’라고 표현해도 괜찮습니다.

혜민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