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아도는 쌀 140만t, 북한에 지원할 수도 없고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기사 이미지

충남 서천군에서 35년간 벼농사를 지어 온 노기래(66)씨는 요즘 희비가 교차한다. 누렇게 익어 가는 들녘을 바라볼 땐 뿌듯하다. 그러나 올해도 대풍이 예상된다는 정부 발표엔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는 “보통 4000㎡마다 소출이 60㎏들이 50~60가마씩이었는데 올해는 70가마를 훌쩍 넘을 것 같다”며 “가격도 가격이지만 다른 지역도 대풍이라는데 쌀 수매나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소비 줄어 올해만 29만t 공급 과잉
북한은 ‘왕가물’로 식량 걱정인데
천안함 폭침 이후 대북지원 막혀
외국에 무상 원조 검토하지만
운송료 비싸고 쌀 수출국들 견제
당정, 급한 대로 20만t 추가 수매

 풍년의 역설이 농심(農心)을 덮쳤다. 당정은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대북 쌀 지원이다. 북한은 지난 7월 ‘왕가물(가뭄)’이 들었다고 발표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도 지난 21일 “북한의 쌀·옥수수 생산량이 지난해 430만t보다 60만t 줄어든 370만t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남북 교역을 전면 중단시킨 5·24 제재 조치가 걸림돌이다.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북측의 사과 없이 남측이 일방적으로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할 명분은 마땅치 않다. 북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정작 남측 정부는 따돌렸다. 정부 관계자는 “남측 정부의 지원을 받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현재 북측 분위기인 것 같다”며 “북측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쌀을 보낼 방법이 없다”고 전했다.

 그러자 농림축산식품부는 넘치는 쌀을 해외 무상원조에 활용하는 안까지 검토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정부 차원에서 쌀을 북한에 보낸 적은 있어도 다른 국가에 지원한 사례는 없었다. 26일 농식품부 당국자는 “국내 쌀을 대외 원조에 활용하더라도 세계무역기구(WTO)나 FAO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지 법률 검토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재해나 경제 문제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나라에 쌀을 무상으로 보내는 게 가능한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해외 원조 ‘검토’에서 ‘실행’ 단계로 가기까지는 넘어야 할 문턱이 많다. 우선 ▶다른 쌀 수출국의 견제 ▶국제 시세에 비해 2~3배 비싼 국산 쌀 가격으로 인한 정부회계 손실 ▶쌀값과 맞먹는 운송료 부담을 풀어야 한다. 정부는 연말 쌀 재고가 150만9000t으로 치솟았던 2010년에도 같은 이유로 대외 원조를 하려다 접었던 일이 있다. 대신 5000t을 북한에 지원했다.

 쌀 대외 원조가 가능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양곡관리특별회계와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감안하면 연간 1만~4만t 정도를 해외 원조에 쓸 수 있다. 올해 쌀 공급 과잉 예상분(29만t)에 턱없이 못 미친다. 쌀 재고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통계청이 추산한 올해 쌀 예상 생산량은 425만8000t에 달한다. 대풍으로 기록됐던 지난해 수준(424만1000t)을 뛰어넘는다. 태풍이나 홍수가 없었고 일조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극심한 가뭄은 쌀 작황엔 오히려 도움이 됐다. 7월 말 현재 139만3000t인 쌀 재고량이 쌀 수확기를 맞아 더 급증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남아도는 쌀을 처리할 마땅한 방법은 없다. 국내 쌀 수요는 해마다 급감하고 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2010년 72.8㎏에서 2014년 65.1㎏으로 10% 넘게 줄었다. 수출이나 원조 길도 사실상 막혀 있다. 쌀 수출량은 2010년 4000t이었는데 그마저 지난해 2000t으로 반 토막 났다. 나라마다 주로 먹는 쌀 품종의 차이가 있는 데다 국산 쌀은 높은 가격 때문에 수출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 국내 가공용 쌀 수요도 늘지 않고 있다. 2010년 54만9000t에서 2014년 53만5000t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김태훈 농촌경제연구원 곡물관측실장은 “과거 10년의 쌀 수급량을 분석했더니 작황과 상관없이 구조적인 내부 공급 과잉이 문제인 걸로 나타났다”며 “한국과 비슷한 쌀 품종을 먹는 일본·대만은 1인당 쌀 연간 소비량이 40~50㎏ 수준에 불과하고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어 수급 문제는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단기간에 효과가 나진 않겠지만 벼 이외의 농작물로 전환을 유도하는 직불금 제도 개정, 가공용 쌀 수요 확대와 수출 지원 같은 중장기 대책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단 당정은 올해 풍작으로 인해 쌀값이 폭락하는 걸 막기 위해 쌀 20만t을 추가로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새누리당과 정부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당정 협의를 연 뒤 이같이 발표했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협의에서 “올해에만 쌀 29만t이 과잉 공급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 쌀값 폭락을 막아야 한다”고 주문했고, 정부는 이런 여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추가 매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쌀 수확이 본격화하는 이달 말까지 시·도별 추가 매입량을 배분한 뒤 다음달부터 연말까지 순차적으로 쌀을 사들일 예정이다.

세종=조현숙 기자, 전수진 기자 newea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