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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JP·박근혜의 한 방의 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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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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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 22일 오전 10시 미국 워싱턴의 연방하원 롱월스 빌딩 1100호.

3년 전 리비아 벵가지 미국 영사관 피습 사건으로 미 외교관 4명이 숨진 사건을 놓고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의 책임을 추궁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현장을 찾았지만 인원 제한으로 청문회장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회의장 밖 복도에서 함께 스마트폰으로 실황중계를 보던 미국 취재진으로부터 ‘힐러리 평’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화당 의원 10명을 데려와도 힐러리 한 명을 당해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표정과 숨 고름, 치밀한 단어 구사, 메시지 전달력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낮 12시55분쯤 그 ‘한 방’이 나왔다.

“벵가지 사건 당시 저는 여러 상념에 여기 여러분(청문회 의원들) 모두를 다 합친 것 이상으로 잠을 못 이뤘습니다. 여러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11시간에 걸친 이날 마라톤 청문회는 사실상 이 한마디로 승부가 났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기자가 도쿄특파원 시절이던 2005년 6월 3일. 김종필 전 총리가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아 보수지 요미우리가 주최한 강연에서 던진 한마디는 압권이었다. 당시 한·일 관계는 독도·역사 교과서 문제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핵심인 지금과 사안만 달랐지 긴장도는 비슷했다.

“올해 일본인들은 일·러 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고종의 황후인 민비가 일본의 미우라 공사 일당에게 참살된 지 110년 되는 해입니다. 자, 이런 일이 일본 황궁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러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역사적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한마디에 게이단렌(經團連) 회의장을 메운 1000여 명의 정·관·재계 인사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 발언은 당시 어떤 일본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요미우리가 1주일 뒤 특집기사 앞머리에 “김씨의 발언 중에 일본인 귀에 따갑게 들리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꼼짝 않고 경청하는 청중들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썼던 게 기억에 남는다. 보도는 못했지만 아팠던 게다. JP의 ‘한 방’은 짧지만 핵심을 찔렀고 통렬했다.

다음주 초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박근혜 외교의 분수령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능수능란하다. 오는 듯 보이지만 가고, 가는 듯 보이지만 온다. 박근혜식 교과서 외교로는 상대하기 힘들 수 있다. 아니 관계가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왜 이년 그년 하셨어요”란 식의 돌직구 화법도 곤란하다. 세련되면서도 아베, 일본인의 감성을 교묘히 자극하는 한 방의 메시지가 절실하다. 승부는 거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 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